새끼손가락 / 이삼우
꼭 여기서 버벅거린다. 키보드 모음 ‘ㅔ’의 자판을 두드려야 할 때 일어나는 터덕거림 현상이다. 그럴 때마다 두더지 게임하듯 검지를 이용한 독수리타법으로 쪼아야 한다.
키보드 3열 자판에 여덟 손가락을 올려놓고 쳐내려가는 타자의 리듬이 수시로 흐트러진다. 오른손 새끼손가락이 오롯이 감당해야 할 글쇠에서 손가락 움직임이 마뜩잖으면서 자음과 모음의 단어 조합이 뒤엉켜 멈추어 선다.
한숨을 내쉬다가도 녀석의 처지를 생각하면 안쓰럽고 측은하다. 새끼손의 둘째 마디가 꺾쇠같이 꺾이어 불구가 되었음에도 넉살 좋은 무명지 옆에 엉거주춤 붙어 있다. 무슨 억하심정이 들어 태업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약속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니 속상하다.
새끼손가락인들 뜻대로 움직일 수 없는 자신이 오죽 답답할까.
열 손가락 깨물어 보면 각기 제 나름대로 할 말이 있다. 엄지는 아귀차고 뚝심이 있어 주먹을 불끈 쥐고 추켜올릴 때는 범접 못 할 알심과 듬쑥함이 묻어난다. 식지는 엄지와 합세하여 집게를 휘두르며 식탐을 즐기고 똘기마저 있어 삿대질로 상대를 제압하려 든다. 곁에 있는 엄지와는 가깝고도 먼 이웃이다. 때로는 전략적 동반자이자, 순망치한의 혈맹관계다. 중지는 허우대가 멀쑥해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같지만, 균형 있는 경계인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 약지는 무명지라 불릴 정도로 존재가치가 희미하지만, 설레는 심장을 가져 예물 반지를 꿰차는 재물복과 영예를 누린다. 가락지 손의 언약을 지키려는 멍에를 짊어졌지만, 탕약을 시음하고 휘휘 저을 수 있는 권한까지 거머쥔 야심 찬 약손이다. 다들 이러니 제가 금수저인 줄 알고 덩드럭거리고 뻗댄다.
남은 것은 새끼손인 소지小指다. 자라다가 멈춘 것 같은 새끼손가락. 베어 먹다 만 소시지처럼 몽총하고 작아도 매운 고추처럼 톡 쏘거나 옹골찬 기질도 보이지 않는다. 문문하게 보이지 않으려면 어기찬 한 방이 필요하지만, 기껏 손가락 걸고 맹세하는 연약한 샌님 흉내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그다지 많지 않다. 거미손처럼 돋나 보이고 싶겠지만, 쿰쿰할 때 코딱지를 파거나 귓구멍이나 후비는 홍싸리 열끗같은 존재다.
그런 녀석에게도 그늘진 세월에 볕들 날도 있었다. 늙마에 글쟁이로 변신한 주인 덕분이었다. 소외된 설움 딛고 컴퓨터 앞에서 현란한 손놀림으로 수필가의 심중을 활자화하는 기쁨을 어디에 비견할 수 있었을까. 작가의 글말을 타닥타닥 쳐내려 갈 때는 손마디가 짜릿했다. 자판을 두드릴 때만은 천하의 엄지도 벤치 신세를 면치 못한다. 글자쇠 앞에서는 어미 격인 무지拇指도 무지無知한 백수건달에 지나지 않지만, 소지는 형용사나 부사를 일궈 내는 주전선수로 인생 역전의 기회를 잡는다. 새끼손에 생기가 돌면서 막내의 설움을 떨쳐내고 의기양양했었다. 그러나…. 신바람은 오래가지 못했다.
서서히 손가락이 굽어지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활자 앞에 버벅대며 삐걱거렸다. 잦은 오타와 실수로 한솥밥 식구들의 눈 밖에 나기 시작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듯, 한 오라기 손마디의 허물을 덮을 수 없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어느 봄날이었다. 강섶 따라 자전거를 타고 가던 중 앞서 달리는 여인의 뒤태에 홀려 자전거와 한몸으로 나뒹굴었다. 몸 여러 부위에 타박상을 당하고 손가락 인대가 늘어나는 사고가 났다.
새끼손인지라 업신여기고 병원에도 가지 않고 뭉갠 것이 화근이 되었다. 소지는 어느새 기역 글자로 휘어져 등 굽은 노인처럼 어눌하다. 낯간지러운 언약도 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이목윤 선생의 <왼손 있어> 시가 떠오른다. 장교로 군 복무 중 사고로 얼굴 화상과 오른쪽 손목을 잃고도 온몸으로 부딪치며 남은 왼손으로 주옥같은 시를 써 내려간 시인 앞에 나는 얼마나 오만하고 경박스러운 푸념인가.
나도 한때 어머니의 생인손이었을 터이다. 코흘리개 자식을 등 떠밀어 외지에 내보내고 잠 못 이루는 밤, 돌아누워 베갯잇을 흥건히 적셨을 어머니. 그 못난 생손이 세상의 수많은 엄지척과 탐욕스러운 검지의 텃세 밭에서 살기 다툼하며, 잘난척하는 장지와 약삭빠른 약지의 틈바구니에 주눅 들지 않고 정성껏 살아왔거늘….
몸 하나하나 어느 부위든 귀천이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끝자락에는 시선이 오래 머물지 않는다. 간장 아래쪽에 없는 듯 붙어 있는 쓸개도, 맹장 끄트머리에 매달려 있는 충수蟲垂도 꼭 외톨진 새끼손같이 홀대받는 것 같아 동병상련을 느낀다.
소지야. 억짓손으로 ‘ㅔ’ 나 ‘P’를 치지 않아도 괜찮다. 네가 슬래시[/]로 빗금 그으며 의기소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수틀리면 엔터키로 행간을 옮겨 새로 시작해도 되고, 시프트키를 지그시 누르고 활자 건반으로 맘껏 연주할 수도 있지 않은가. 겨우 문단 말석에 글쟁이를 흉내 내는 주제에 애꿎은 소지만 괄시한 것이 내 무능의 소치가 아닐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