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 오덕렬 

마음이 안정감을 잃을 때는 고향을 찾는다. 부모님을 뵙고, 고샅의 생울타리, 키 낮은 토담, 그리고 허술한 사립문을 마주하면 마음은 스스로 평정을 얻는다. 어디, 고향에서 푸근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으랴만 나에게는 어릴 적 사랑방에 얽힌 추억 때문에 더하는지도 모르겠다.

요새는 명절 때나 사랑방에 불을 지핀다. 그러나 하냥 사랑방의 지창紙窓은 햇발을 담아들여 따스한 호수를 이룬다. 지난 가을날 햇발이 성근 오후였다. 뒤꼍으로 돌아가니 긴 그림자 자락이 사랑방 죽창竹窓안을 엿보고 있지 않은가! 웬일인지 마음이 안쪽으로 끌려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맞아주는 것은 방을 지키는 목침, 나무재떨이, 호롱등잔, 그리고 벽에 걸린 천자문千字文들로 예나 다름없이 눈에 익다. 목침은 사랑방 세간의 으뜸이라 할 만하다. 베개의 역할을 떠나서 목침돌림 목침 단자, 목침찜에 이르기까지 화제를 풍성하게 뿌렸었다.

사랑방의 계절은 아무래도 겨울철이 제격이라 하겠다. 눈이 길을 넘게 며칠이고 내리는 날이면 사랑방은 한층 활기가 돈다. 동네 일꾼들이 모여 앉아 손바닥에 퉤퉤 침을 뱉어 가며 새끼를 꼬고, 망태나 덕석을 엮거나 짚신을 삼으며 이야기판을 벌인다. 웃음꽃이 만발한 사랑방은 매서운 추위에도 쇠죽을 쑤어 잘잘 끓었다. 아버지께서 쇠죽을 끓일 때면 나는 곁에 있다가 장작을 아궁이가 터지도록 모으기도 했었다.

위 아랫목이 따로 업이 끓는 사랑방에서 일손을 잠시 놓은 동촌댁네 꼴머슴이 드르렁 코를 고는 것이었다. 전에 보았던 대로 불침을 놓으려고 숨을 죽이며 성냥을 태워 숯을 만들었다. 어디다 놓을 것인가? 두리번대다가 숯의 꽁무니에 침을 발라 발등을 세우고 불을 댕겼다. 성냥 숯은 꼭대기부터 발갛게 타들어 간다. 사랑꾼은 자다가 놀라는 꼴을 연상하는지 터져나는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는데 꼴머슴은 계속 코를 고는 것이다. 이윽고, 코 고는 리듬이 깨지고 미동이 시작된다.

셋, 둘, 하나......
속으로 폭발의 순간을 쟀다.
'아아, 뜨거어!'

엉겁결에 벌떡 일어나 베고 자던 목침으로 누구를 내리칠 기세다. 나는 겁을 먹고 가마니틀 뒤로 숨었고 다른 머슴들은 시치미를 뗀다. 서로 한동안 얼굴만 쳐다보다가 상머슴이 추렴 술을 먹자고 깨운 거라며 너스레를 떤다. 단잠을 깬 것이 아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에참, 에참' 입맛을 다시며 치미는 부아를 참는다. 금방 터질 것 같이 팽팽하던 사랑방의 분위기가 한고비를 넘기자 뽀스락 장난으로 이어진다. 서로를 건드리며 또 한바탕 킬킬거리고 나자 목이 마르고 뱃속도 출출해진 머슴들은 탁배기 한 잔이 간절하다.

아까 너스레로 말했던 추렴 술을 가져오기로 한다. 두붓국을 끓이고 무청 김치 한 사발로 술상이 보아진다. 도래상을 둘러앉아 꿀꺽꿀꺽 술잔을 비우니 씽씽 우는 문풍지 소리에도 마음은 훈훈하다. 이렇게 넉넉한 인정을 나눠 마시며 기쁨도 슬픔도 함께 하던 사랑방이지만 항상 머슴들의 차지로만 있지는 않았다.

한때는 글방을 안쳐 서당 아이들이 모여들기도 하였다. 저녁 글 소리가 끊기면 '에헴 에헴' 헛기침을 하면서 동네 어르신들이 모이신다. 좌상은 아랫목에서 담배통을 화로에 묻고는 옴질옴질 연기를 뿜으신다. 피어나는 연기 속에 마을의 관혼상제가 오르내리고 농가월령가 아는 바 없어도 내년의 농사일은 화롯가에서 시작된다. 재떨이 탕탕, 재를 털며 자근자근 아낀 이야기 끝은 걸러지고 보태져 한 생각으로 뭉뚱그려진다. 이렇게 뜻이 모아지는 사랑방은 새 소식이 나가는 곳이요, 샘터의 아낙네는 이 소식을 전하느라 입이 더욱 바빠진다.

사랑방에서 밤늦도록 이야기가 끝이 가도 없이 이어질 때 밖에서는 함박눈이 펑펑 내린다. 대나무도 솜옷을 입어 구부정 노인 같고 짚가리도 영락없는 신선으로 서 있다. 하늘도 땅도 하나가 된 겨울밤은 지상천국이다. 늦은 밤 흰옷의 어르신들이 집으로 돌아가려 문을 나선다.

"오매, 눈이 흐거게 왔네!"
"풍년들랑갑네. 어서 가 소매 보소."
논밭의 거름이 귀하던 시절, 오줌도 제 집에 누어 보리를 가꾸던 때라서 건네는 말들이다.

우리 집 사랑방은 큰할아버님 계시던 방보다야 묵은 책 그득한 벽장도 없고 대를 물려 손때로 윤이 나는 쾌상에서 묵향墨香이 퍼지는 일도 없었다. 그래서 때로 집 없는 이웃에게 따뜻한 살림방이 되기도 했고 길손도 묵어갔다. 날이 저물어 찾아든 과객過客에겐 한동자가 마련되고 그날은 한식구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사랑방은 지난날의 우리네 생활의 풍속도였다. 지금은 추억거리만 유품처럼 남았을 뿐이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옛날의 사랑방의 분위기를 되찾을 길이 이제는 없다. 사랑방에 넘치던 낭만과 인정, 어르신들의 당당하고 여유 있던 모습, 그리고 불침을 맞고도 다짜고짜로 화만 내지 않던 꼴머슴의 모습이 정겹다.

불현듯 현대 생활 속에서 사랑방의 구수하고 소박하고 인정이 넘치는 조화된 문화를 실천하는 한 사람으로 남고 싶다. 그래, 마음의 한 구속에라도 사랑방을 차려야겠다. 정이 넘치는 사랑방의 문화를 현대적 공간에서 이루어 볼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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