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풀다 / 장미숙
햇볕이 도시의 등덜미를 움켜잡고 있을 즈음, 근처 산에서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문이다. 준비물은 딱히 없고 폭넓은 감성과 튼튼한 다리만 있으면 된단다. 어떤 그림과 조각을 만날까 상상하며 숲 입구에 들어서자 푸른 기를 머금은 바람이 마중 나온다. 주위를 맴돌며 슬쩍 팔짱을 낀다. 뒤이어 숲 특유의 생기발랄한 냄새가 등을 떠민다.
맨 먼저 눈 앞에 펼쳐진 건, 우람한 상수리나무이다. 입구에 턱 하니 버티고 서 있는 품이 숲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손색없다. 한 아름이나 되는 줄기에 사방으로 뻗은 가지는 숲의 벽면을 가득 메우고도 넘쳐날 만큼 풍성하다. 길쭉한 이파리 하나하나가 허공을 빼곡하게 채웠다. 깔끔한 붓 터치로 가지 사이를 마치 물길처럼 그려놓았다. 세밀화의 장점을 살린 솜씨가 돋보인다.
매끈하고 날렵한 이파리에 비해 줄기는 강하고 거칠다. 오목과 볼록의 우둘투둘한 무늬가 선명하다. 아무렇게나 조각한 듯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정한 흐름과 리듬이 있다. 조각가의 솜씨가 무척 세심하게 작용했음을 알겠다. 세월의 흔적까지 아로새겨 견고하고 탄탄한 생명에의 의지를 살렸다.
전시회란 조화가 이뤄져야 보는 재미가 있다. 상수리나무처럼 큰 작품이 있는가 하면 아기자기하고 앙증맞은 작품들도 즐비하다. 갈참나무, 산딸나무, 때죽나무, 단풍나무, 산사나무들이 주위에 배경으로 서 있다. 다른 종이 섞여 있지만 이질적이지 않고 조화롭다. 균형미가 특히 압권이다. 직선으로 곧게 뻗은 줄기와 두 갈래, 세 갈래, 많게는 예닐곱 갈래도 수두룩하다.
줄기마다 부드럽게 휘어진 가지를 매달았다. 가지는 스스럼없이 섞여서 애초에 그랬던 것처럼 친근함을 과시한다. 초록 물감을 쫙 뿌려놓은 듯 자유 분망한 터치가 사실화와 추상화를 넘나든다. 완만한 곡선은 서로를 품어 안는 데 적합하다. 일정한 형태가 아니라도 치우침이 없어 보기에 편안하다. 사이사이 바람길이 있고 햇빛이 통과하는 지름길도 푼푼하다.
여백이 있는가 하면 촘촘하게 채워서 밀도 있는 풍경도 곁들였다. 서로가 맞닿은 부분은 조용히 스며들면서 어우러진다. 큰 나무와 작은 나무가 자신의 영역에 욕심을 부리지 않은 미덕을 지녔다. 하늘로 쭉쭉 뻗은 나무는 큰 키로 숲의 중심을 잡는다. 굵은 붓 터치로 마감한 그림자가 숲에 음영을 드리운다.
느긋한 바람의 뒤를 따라 숲 전시회장을 돌다 보니 앞쪽에서 분주한 새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이 새소리를 따라 그곳으로 향한다. 무슨 특별한 작품이라도 있는 걸까. 서둘러 걸음을 옮긴다. 분위기부터 심상찮다. 나무 하나의 모양이 예사롭지 않다. 설치미술인가. 당당하게 서 있어야 할 줄기가 사선으로 기울어졌다. 아래를 보니 뿌리가 반쯤 뽑혔다. 뿌리는 흙을 붙잡고 있지만 찢긴 부분의 상처가 심하다. 간신히 두 나무 사이에 걸친 모양새로 마치 한발로 땅을 짚고 있는 사람처럼 불안정하다.
생에서 죽음으로 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듯 그 상태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뿌리가 반쯤 드러났으니 죽음은 머지않았으리라. 그런데 나무를 받치고 있는 다른 나무들이 꿋꿋하고 의연하다. 이미 가지가 여러 군데 꺾였음에도 쓰러진 나무를 꼭 부둥켜안은 모습이라니. 생명을 가진 것들의 살아가는 방식은 무릇 저런 게 아니겠는가.
산다는 건 죽음을 전제한다. 생명이 진한 숨을 토하는 숲에 삶만이 아닌 죽음이 함께함을 실감한다. 생과 사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나무들, 더불어 사는 선한 의지에 감동하는 순간이다.
아까부터 한쪽이 시끌벅적하다. 밝고 화사한 목소리로 보아 멋진 작품이 전시되어 있음을 짐작한다. 화살나무와 회양목이 즐비한 길을 따라 조금 더 가니 눈앞이 시원해진다. 우람한 둥치를 가졌는데도 구부러짐 없이 반듯한 메타세쿼이아나 군락지다. 대형 붓으로 망설임 없이 일필휘지한 매끈한 줄기는 하늘까지 닿았다.
신의 기운을 받은 우듬지가 신비로운 기를 나무의 뿌리까지 전달한 것인가. 마치 자를 대고 선을 그은 듯, 가지 하나하나도 흐트러짐이 없다. 절도와 기품있는 모양새가 전시회를 빛내는 명품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옆에 있는 스트로브잣나무도 큰 키를 자랑한다. 높이가 한정되어 있지 않은 숲의 캔버스는 하늘로 치솟는 나무들에 무한한 꿈을 선사한다. 자연을 통해 꿈에 다다르고 싶은 사람들의 소망이 나무를 더욱 곧고 푸르게 한다.
숲을 대표하는 굵직굵직한 그림들을 감상했으니 이제 조각품들을 둘러볼 차례다. 나무는 종합예술품이다. 가지와 잎으로 허공에 유채색의 찬란한 그림을 그렸다면 뿌리는 조각의 강인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숲길을 뒤덮은 수만 갈래의 뿌리들, 그 오묘함에 전율이 인다. 뒤틀리고 꼬이고 휘돌아가고 구부러진 모양은 같은 게 없다. 굵기며 길이, 색깔조차 가지각색이다. 마치 나무가 자신의 마음을 초현실주의 기법으로 표현한 것 같다. 나무의 몸체가 극사실주의라면 뿌리는 초현실주의의 기괴함을 닮아있다.
사람들에게 수없이 밟혀 짓이기고 뭉개져서 형체마저 모호하다. 변형되는 운명을 극복해보려는 나무의 몸부림을 뿌리의 뒤틀림에서 읽는다. 누구도 표현할 수 없는 치열한 삶의 세계를 나무는 의지의 발현으로 뿌리에 담았으니 이보다 더 훌륭한 조각품이 어디 있겠는가. 죽어서도 뿌리를 접지 않는 나무의 성품을 알만하다.
내어주는 삶에 익숙한 나무는 줄기에도 생명을 키운다. 담쟁이덩굴이 푸른 치마를 돌돌 말아 잔잔한 수채화로 피어났다. 덩굴식물에 캔버스가 되어주는 나무줄기는 상생의 덕을 지녔다. 뭔가를 타고 올라야만 사는 것들의 의지 또한 옹골지다. 가느다란 손을 수없이 뻗쳐 거친 수피를 붙잡았다. 짙은 암갈색의 칙칙함과 파릇한 색의 대비가 주위를 환하게 한다.
숲은 살아있는 색의 원형이다. 꿈틀꿈틀 색은 수없이 변모하고 흐르며 변화를 주도한다. 사계절의 모습을 다 담고도 넘쳐나는 천연의 색으로 생명을 유지한다. 살아있는 그림 앞에 가슴이 열리고 눈이 밝아지는 건 그 때문이다. 답답한 숨을 유연하게 풀고 돌아오는 길, 초록의 바탕 속에 배롱나무가 선명한 붉은빛을 펼치며 화룡점정을 찍는 중이다.
(『선수필』2025년 가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