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협곡 / 김정읍

 

 

어떤 선택을 하는 순간은 늘 망설여지고 불안하기 마련이다. 그 밤도 그랬다.

호주 북부의 Kings Canon을 등반하는 코스는 두 개의 길이 있다. 다섯 시간 이상의 산행으로 정상을 거치는 험한 길(Rim Walk)과 두어 시간으로 그 일부만 걷는 코스(Creek Walk)이다. 우리 일행은 당연히 Rim Walk 코스려니 생각했는데, 내 연배인 두 분이 Creek Walk 코스를 선택해 버렸다. 나이 생각지 않고 호기롭게 자신했다가 민폐를 끼치는, 국가적 망신이 발생하면 어쩌나. 많이 망설였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 정상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사막지대라 불리는 이곳은 초봄인데도 낮에는 섭씨 30도 이상이다. 하여 등반 시에는 반드시 2리터 이상의 물을 준비하고 계속 마시면서 가는 것이 원칙이라고 가이드는 강조한다. 어깨가 묵직하다. 등반 초입부터 500개의 돌계단이 가파르게 버티고 나선다. 산 아래서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200계단쯤 올라보고 자신이 없으면 하산하라는 주최 측의 당부다. 서두르지 말고 침착하게 완주하자는 마음으로 천천히 따라간다. 200계단쯤 올라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래를 내려다본다. 두 손을 들고 흔들어주는 주최 측의 손짓이, 그만 내려오라는 것인지 잘 다녀오라는 응원인지 알 수가 없다.

앞서가던 젊은 동행이 힘든 표정으로 숨을 고르고 있다. 그러나 포기하지는 않을 자세다. 잠시 망설이다가 산 아래를 향하여 손을 흔들어 보이고 나도 다시 계단을 오른다. 더 가팔라 진 경사에 체면불구하고 네 발로 기어오른다. 물병 네 개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른다. 물병의 무게를 줄이고픈 마음에 물을 마시다가도 화장실 문제가 걱정이 되어 주춤거린다. 주위 경관을 구경할 여유도 없이 헉헉거리며 발밑만 보고 걷는다. 돌계단의 바위들이 붉으레하다. 붉은 색깔에 정감이 간다. 힘을 내라고 핏빛 용기를 주는 것 같다.

발걸음도 어깨도 점점 더 무거워질 즈음에 우리 팀의 청일점 선생님이 내 배낭속의 물병을 빼서 본인의 배낭에 넣는다. 왜 이러시냐고 말려도 막무가내다. 한 병의 물 다 마시면 그때 한 병씩 가져가라 하신다. 이 고마운 마음에 더 용기를 낸다. 마침내 500계단을 다 올랐다. 다리가 휘청거린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전망대에 서 본다. 산 아래 끝없이 펼쳐진 붉은 땅, 사막나무들이 초록빛으로 점점이 찍혀있는 것 같은 경치가 아득하다.

산 위에 올라서니 예상했던 대로 거의 평평하게 오르내린다. 흙은 보이지 않고 붉은 돌과 바위, 그저 바위산이다.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인 바위층은 억겁의 세월을 말하는 것이란다. 골이 깊은 바위산 사이를 지날 때, 그곳은 인증샷을 남기는 장소란다. 나도 용기를 내어 두 팔을 높이 올리고 야호~, 한 컷 남겼다. 평평한 듯 울퉁불퉁한 돌길의 어느 쯤에는 물결무늬의 바위가 있고 그 옆에는 조그마한 water hole이 있음을 설명하는 가이드, 이 바위산은 바다에서 솟아오른 것이란다. 굽이굽이 바위틈 사이로 자리한 나무들은 바위산인 줄 모르는 듯 씩씩하게 초록빛을 올리고 있다. 흙은 보이지도 않는데 바위틈 돌산에 뿌리내린 청청한 나무들을 보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생물은 바로 이런 식물이라는 생각을 굳힌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나무 밑은 노천화장실이 된다.

모양과 색깔을 달리하는 바위들을 보며 조심조심 걷는다. 발밑만 바라보며 걷다가, 간혹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이쪽저쪽 산세를 훔쳐보며 붉은 산의 매력에 빠져든다. 힘든 줄도 모르고 걷는다. 선두주자와 앞서가던 가이드, 어느 지점에 멈춰 서서 기다린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우리 일행 중에 오늘, 85세 생일인 사람이 있으니 함께 축하하자며 Mr R 씨를 소개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생일 축하의 노랫소리가 Kings Canyon 정상에 울려 퍼진다. 대자연이 함께 축하하는 멋진 순간이다.

상기된 마음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이제는 더욱 발밑을 주시하며 걸으라는 가이드의 당부. 아직까지는 돌산인 거 외에 협곡이라 할 만한 경치는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차, 갑자기 다가선 아찔한 절벽. 천 길이나 되는 거 같은 낭떠러지, 눈길마저 줄 수 없는 오싹함이다. 오금이 저린다. 한동안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눈길만 바쁘다.

온통 황토를 칠해 놓은 것 같은 바위산과 절벽이 맞대어진 듯 또 틈을 벌리고 있는 계곡, 아니 협곡이다. 깎아지른 것 같은 어느 절벽은 도배를 해놓은 벽처럼 깔끔하고 반들반들하다. 다른 면은 빗살무늬를 그린 듯하고 또 다른 면은 투박한 바위 모습 그대로 장엄하다. 협곡의 거대함과 기이함이라니, 경외감이 인다. 이 멋진 Kings Canyon의 장관을 내가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다.

이제 가파른 돌계단을 내려가야 한다. 오를 때보다 더 겁이 난다. 다행히 난간이 있어 꼭 잡고 천천히 내려간다. 밑에 내려가면 저 매끈한 절벽의 특성을 볼 수 있겠지 했는데, 웬걸 협곡 바닥엔 물이, 강을 이루고 있다. 거대한 바위산 메마른 협곡에 이렇게 맑은 물이 강처럼 흐르고, 또 호수처럼 잔잔하다니. 어떻게 …. 협곡에 쏟아지는 태양빛과 수시로 몰려다니는 바람의 생기가 생명을 불어넣었나. 나무들도 울창하고 새들의 노랫소리도 들린다. 심지어 벌, 나비도 춤을 추고 열매도 맺혀 있다. 이름하여 ‘에덴의 정원’이란다.

에덴은 안식처가 아닌가. 후들거리는 다리를 달래며 주저앉아 숨을 고른다. 갈증 나는 목을 축이고, 선악과가 아닌 간식들을 먹으며 추억을 담는다. 제법 많은 인파가 모였는데도 고요하다. 모두들 숙연하게 자기의 감정을 추스르는 모양이다. 이토록 경이스러운 대자연 앞에서 난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가.

하산 길, 폭염을 염려하던 기상예보와 달리 우리의 산행을 도왔던 날씨가 갑자기 비를 뿌린다. 우산을 꺼낼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가운 마음이다. 잘 가라고 내리는 가랑비인가. 어쩔 수 없이 에덴동산을 쫓겨나야만 했던 원조들의 눈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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