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나무 / 진영숙

 

 

아침 7시 핸드폰이 울린다. 아버지의 하루는 일찍 시작된다.

“모레 오너라.”

일방적인 전달일 뿐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편찮으신 데는 없는지, 드시고 싶은 음식은 무엇인지 몇 마디 물었지만, 벌써 전화기는 뚜- 소리를 내며 끊겨버렸다. 멍하게 한참 동안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아버지의 시제는 항상 모레이다. 모레는 내가 식사 당번임을 알리는 기호이다. 바로 오늘이나 내일이면 자식들이 급한 일이 생겨 어려워질까 하는 배려의 시간이기도 하다.

태풍이 비껴간 날씨는 연일 30도를 웃돌고 좀처럼 밤에도 열대야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찜통더위와 불볕더위를 넘어 가마솥더위 등 날씨에 대한 신조어들이 생겨나고 있다.

시장을 보고 가스레인지를 켜자, 집안 온도가 한층 올라갔다. 등에서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에어컨 없이 견뎌보자고 했던 무모함이 후회로 돌아왔다. 조리한 음식과 이것저것 바구니에 담고 마트에 들러 막걸리도 다섯 병을 샀다. 어느 날부터 막걸리를 챙기는 것이 규칙이 되었다.

친정집에 도착한 뒤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청소기를 돌렸다. 아버지는 내 앞에서 바닥 매트며 카펫, 작은 물건들을 청소하기 좋게 들어주었다. 청소가 끝나면 “어서 가거라.” 하며 잠시도 틈을 주지 않는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네 번째 여름을 맞고 있다. 평생 손수 집안일을 해 본 적이 없는 아버지는 밥솥과 세탁기, 전자레인지 등 가전제품의 버튼을 누르는 것부터 배워야 했다. 아침이면 하루 드실 만큼의 밥을 안치고, 냉장고에 있는 반찬이나 국을 데워서 드신다. 음식이 들어 있는 통은 줄을 세워 먼저 들어온 것은 앞으로, 나중에 들어온 것은 뒤로 정리를 한다. 냉장고며 싱크대를 보면 깔끔한 아버지의 성격이 엿보인다.

어머니의 부재는 아버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모든 집안 대소사에 참석을 거절했다. 아버지의 우주였던 어머니의 빈자리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었다. 언젠가 언니에게 어머니가 동네 마실 갔다가 금방이라도 불쑥 나타날 것만 같다는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바람이 불어 문이라도 덜컹거리는 날, 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

이제는 찾아갈 만한 친구와 지인도 떠나버린 고향에서 아버지는 신문과 텔레비전을 벗 삼아 살아가고 계신다. 이것저것 여쭤보면 그때마다 하는 대답은 “괜찮다.”이다. 자식들에게 걱정을 주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을 알기에 돌아 나오는 나의 마음은 무너진다. 외로움의 깊이를 가늠할 수가 없다. 언제까지 이런 시간이 나에게 주어질까.

동네 어귀를 나오면 수호신처럼 팽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동쪽과 서쪽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마치 한 그루처럼 보인다. 정확한 수령은 알 수 없지만, 인근에 지방기념물 19호로 지정된 팽나무 군락지가 있는 것을 보면 500년은 족히 되었다고 미루어 짐작해 본다.

팽나무는 우리나라의 주로 남부 지방에 서식하며 폭 나무, 포구 나무 등으로 불린다. 예로부터 풍수지리설에 따라 마을의 기운이 약한 곳을 보태주는 비보림이나 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으로 많이 심어왔다.

팽나무 주변에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월대가 있다. 유년 시절에는 치마 가득 공깃돌을 주워 손톱이 다 닳을 만큼 공기놀이를 하곤 했다. 한 번 모아 놓은 공깃돌은 오다가다 여자아이들의 재미있는 놀이가 되었다. 팽나무 아래에서 놀던 옛 벗들의 얼굴이 하나둘 떠오른다.

팽나무는 70년 전, 4‧3사건 때 무모하게 끌려가 목숨을 잃은 할아버지, 집안의 장남으로 무거운 짐을 짊어진 열일곱 살의 푸르른 아버지의 모습도 기억하고 있으리라. 여름이면 지나가는 나그네의 땀을 식혀주는 그늘이 되어 주었고, 무거운 물 허벅을 짊어지고 지나가던 여인의 쉼팡이 되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삶의 무게, 휘몰아치는 바람에도 내가 기대고 견딜 힘. 아름드리나무가 되어 근 한 세기 동안 그 자리에 여전히 버티고 서 있는 거목이 되어 있었다. 시간의 흐름은 팽나무도 감당하기 어려웠던 걸까. 움푹 팬 옹이. 숱한 세월의 아픔을 오롯이 가슴으로 받아내 차마 표현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마음은 아니었을까.

팔월의 열기는 식을 줄 모르고 날마다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요즘은 날씨 예보를 찾아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의 지친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아버지는 이 견딜 수 없는 더위에 선풍기 하나로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더운 열기가 훅 올라온다. 하지만 나는 이 여름을 오랫동안 붙들고 싶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