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 이야기 / 권현옥
후다닥 시원하게. 집에 오면 무엇이든 내려놓거나 바꾼다.
외출을 위한 준비보다 동작이 빠르다. 구두, 가방, 윗옷, 다음에 오는 급한 것, 그건 브래지어를 벗고 티셔츠를 입는 일이다. 이만큼 시원한 게 있을까. 밖에선 답답한 줄 모르고 있다가 집에만 들어서면 그것이 답답해져 급해진다.
무엇이 무엇을 구속했단 말인가. 브래지어를 꼭 착용해야 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언제나 입고 나간다. 집안에서는 남편 아닌 누구라도 있으면 갖춰야 떳떳하다. 코르셋은 드러냄과 모양새를 위해서지만 애초의 브래지어는 손수건으로 시작했으니 멋이라기보다는 가리고 보호하기 위한 이유였다. 나도 멋 쪽보다는 그쪽에 무게를 두었나보다.
브래지어는 은밀함을 당당하게 바꾸는 이율배반적인 정서를 갖고 있다. 직접적인 노출을 가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더 강조를 해버리는 요즘이니 브래지어는 당당해졌다. 밖에서는 무장을 함으로써 해방감을 느끼고 집에서는 브래지어로부터 해방되면서 자유를 느끼니 묘하지 않은가. 당당하기 위해 입었다가 자유를 위해 벗는다니…. 자유의 모습을 양쪽 끝에서 급격하게 잡아당기고 변환시켜버리는 능력을 가진 특별한 속옷이다. 옷이면서도 구체적으로는 속옷. 은밀하게는 유혹적 매력을 발산하는가 하면 젖을 먹였다는 몸의 추억을 들춰주는 역할도 하고 상황에 따라서는 섹시함과 부끄러움이 원칙 없이 오가기도 한다.
여자의 유방이 2개로 부족하다고 퀸터 그라스는 <넙치>에서 말한다. 이분법의 사고방식을 넘기 위해 제3의 유방이 필요하다며 소설을 썼다. 세상의 많은 자식들은 엄마의 젖을 먹고 자랐는데 남성이 유독 두 개의 유방을 그리워하고 흠칫 눈길 돌리는 본능이 있는 걸 보면 풍족하게 3개의 유방도 괜찮으리라. 그런데 벌서 나의 고정관념이 걸고 넘어진다. 브래지어의 컵이 3개라고 생각하니 갸우뚱 웃음이 나온다.
얼마 전 신호등 앞에서 서 있다가 고개를 상가 앞 인도 쪽으로 돌렸다. 팬티와 브라가 행거에 걸려 있었다. 왜 이 더운 뙤약볕에 속옷을…. 얄궂은 생각이 들었다. 주인은 에어컨이 켜진 그 가게 안에 있으리라.
마트에 가면 겹겹이 걸린 속옷도 보고 TV홈쇼핑에서는 속옷만 입고 서 있는 마네킹이나 광고인을 보며 세밀한 설명까지 듣는다. 흔하디흔한 일상인데, 횡단보도 옆 인도에 있는 그 장면이 마뜩찮은 이유가 뭘까. 골목 시장에서나 시골장터에 쌓인 속옷이 괜찮았던 이유는 또 뭘까.
속옷이라는 단어가 주는 은유를 무시하고 함부로 다루어서일까. 뙤약볕에 드러난 민망함 때문일까. 지나가다 본 게 아니고 서 있다가 본 것이라 그럴까. 아무래도 누구라도 멋쩍게 서 있는 횡단보도 앞이라 그랬을 것 같고 태양이 너무 뜨거워서였던 것 같다.
〈더 브라〉라는 영화가 있다. 말소리는 전혀 없고 기차와 호루라기 소리가 소리의 전부다. 철길을 뛰어다니며 꼬마가 호루라기 불면 사람들은 철길과 바짝 붙은 집으로 후다닥 들어가고 여자들은 빨래를 급히 걷어간다. 기차가 지나가면 다시 기찻길엔 빨래가 가로질러 널리고 바람에 나부낀다. 어느 날 기관사 눌란은 채 걷어가지 못한 브라가 기차에 걸리는 것을 본다. 소중하게 걷어 가방에 넣는다. 운행이 없는 시간 주인에게 돌려주고 싶어 마을 여자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한다.
다양한 반응과 파생되는 문제만 있다. 성희롱으로 보고 상대도 안 하는 여자, 브래지어를 건네는 남자에게 노골적으로 끼를 부리는 여자, 브래지어에 욕심을 내는 여자가 있다. 주인을 찾기 힘들자 아예 브래지어 장사를 하며 동네를 돌아다니고 눈치를 살피지만 동네 남자들에게 수상한 남자로 몰려 철길에 묶인다. 호루라기를 불던 꼬마가 아슬아슬 사슬을 끊어주자 눌란은 꼬마를 밖으로 밀치고 자신은 철길에 바짝 눕는다. 기차가 지나간다.
두 사람은 혼이 빠진 듯 철길을 걷다가 빨랫줄에 하늘색 팬티가 걸려있는 것을 본다. 갖고 다니던 브라와 같은 세트 속옷이다. 브라를 꺼내 팬티 옆에 나란히 집개로 눌러 놓는다. 바람에 흔들려도 집게에 잡혀있는 브라와 팬티가 아름답다. 흐뭇하게 서로를 바라보며 초라한 언덕 위의 집으로 향하는 두 사람의 장면이 영화의 끝이다. 무언無言의 절제미다.
한 여자의 소중한 브래지어를 돌려주고 싶었는지, 그 예쁜 브라의 주인이 누굴까 알고 싶었는지, 짜릿한 상상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철길을 가로질러 널려 있는 색색 빨래의 나부낌과 사람들의 손놀림, 그리고 예쁜 브라를 입어보고 싶어하는 여자들의 심리가 그려져있다.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가와 내가 어떻게 보는가의 상충된 문제는 어디에나 있다. 약간의 느낌 차이로 마음이 상하고 흥이 살아난다. 브래지어를 입을 때와 벗을 때의 느낌이 다르듯. 그 횡단보도 앞에서와 골목시장에서의 느낌이 다르듯. 나의 심리도 고정관념의 촌스러움 일 수도 있고 그날 너무 더운 날이라 내가 예민했을 수도 있다. 영화 〈더 브라〉는 그렇게 순연하게 감상해놓고 길거리의 브라를 왜 불편하게 보았는지 모르겠다. 지금 이 글을 지면에 쓰면 누군가는 또 어떨지…, 아직 의심 가는 게 많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