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에 / 이명애
어릴 적, 어른들은 나를 ‘멍애’라고 불렀다. 발음이 어려웠던 건지, 그저 부르기 편해서였는지는 알 수 없다. 앞니가 드문드문 빠져 있던 혜숙 언니네 할머니는 동네가 떠나가라 나를 불러 심부름을 시켰고, 마을 아재들까지 소를 빗댄 듯 소멍애로 부르며 놀리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입이 댓 발이나 튀어나왔다.
외딴 시골 마을, 여자아이는 나 하나뿐이었다. 짓궂은 남자애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산길 어귀에 미리 숨어 있다가, 언덕배기에서 솔방울을 던지거나 작대기에 물뱀을 끼워 휘두르며 겁을 주곤 했다. 깡통을 굴려 내 앞을 가로막거나, 뒤에서 졸졸 따라오며 키득거렸다. 내가 화를 내면 더 신이 나서 멍멍 소리를 내며 괴롭혔다.
중학교 때는 김수희의 <멍에>가 유행처럼 번졌다. 라디오든 텔레비전이든 틀기만 하면 어김없이 흘러나왔다. ‘사랑의 기로에 서서 슬픔을 갖지 말아요~.’ 첫 소절만 들어도 애잔한 목소리와 절절한 가사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김수희는 <가요톱10>의 단골손님이 되었고, 연말 가요 대상까지 휩쓸었다. <못 잊겠어요>, <남행열차>, <서울 여자>까지 히트곡이 쏟아졌다. 그 시절, 그녀의 노래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농담이 나올 정도였다.
새로 부임한 스물일곱 수학 선생님도 수업 중에 졸음이 몰려오거나 분위기가 처지면 나를 교탁으로 나오게 해 김수희의 <멍에>를 부르라 했다. 복도에서 마주쳐도 나를 붙잡고 노래를 들려 달라 하셨다. “니가 가로등도, 하면 나는 졸고 있는.”이라 하시면서. 단발머리 여학생에게 ‘사랑의 기로에 서서’나 ‘두 손을 마주 잡고’ 같은 구절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걸까. 다른 가사로 바꿔 농담하셨지만, 그 일로 다른 선생님들까지 나를 ‘멍애’라고 불렀다. 멍에의 뜻이 무엇인지 몰라도, 그 단어가 웃음거리라는 건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알고 보니 멍에는 소에게 쟁기나 마차를 끌릴 때 목에 씌우는 둥근 나무틀이다. 어린 마음에도 코뚜레에 코가 꿰인 채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어미 소가 안쓰러웠다. 어른들은 소에게 그렇게 코뚜레를 해줘야 일을 시킬 수 있다고 했다. 소를 다루기 쉽게 하려고 그런다지만, 살아 있는 생명체의 코를 뚫는 건 잔인해 보였다. 자신에게 씌워진 고통을 거부할 힘도 없는 소를 보며 맘이 아팠다. 행여 놓칠세라 어미 곁을 맴도는 송아지의 처지가 나와 닮아 보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엄마는 나를 낳은 후 큰 병을 앓아 오래 집을 비워야 했다. 나는 엄마 품에 안기지 못했고, 젖 한번 제대로 물어본 기억이 없다. 늘 배가 고팠고, 외로웠고, 엄마가 그리워 자주 울었다. 엄마가 생을 내려놓은 뒤, 아버지의 관심마저 내게서 멀어진 듯했다. 사춘기 시절, 나는 서울로 올라와 중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다른 집 아이들처럼 안전한 울타리를 원했다. 허름해도 좋으니, 변함없이 나를 감싸줄 든든한 둥지를 간절히 바랐다.
코를 꿰였을망정 마른 짚이 깔린 외양간에서 한가로이 되새김질하는 어미 소와 보내는 평범한 일상은 내게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남의 말에 쉽게 상처받고, 혼자 끙끙 앓았다. 남들과 끊임없이 나를 비교하며, 나의 모난 부분만 들춰보게 되었다.
내 이름은 명애다. 밝을 ‘명(明)’, 사랑할 ‘애(愛)’. 학교생활에서, 이력서에서, 우편물 봉투에서 나는 이 이름을 쓴다. 낯선 사람에게 나를 처음 소개할 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정작 나는 그 안에 담긴 뜻을 곱씹어 본 적이 없었다. 티 없이 밝게 살아가라고 지어준,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막내딸에게 준 선물을 철없이 외면했다. 잔소리하며 늦은 밤 대문 앞에 나와서 딸을 기다려주는 아버지. 된장찌개 끓여 올린 밥상을 내놓는 엄마. 다른 사람이 가진, 나는 가질 수 없는 것을 좇느라 정작 소중한 정체성을 놓치고 살았다. 요즘은 원하면 이름쯤 쉽게 바꿀 수 있지만, 나는 개명을 원했던 것은 아니다. 나 자신을 바꾸고 싶었다.
남들이 어떻게 부르든, 나를 짓누르는 멍에는 결국 스스로 씌운 것이었다. 이제는 안다. 사랑과 빛의 이름 ‘명애’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 마음의 기둥부터 바로 세워야 한다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