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뒷면 / 윤정인
뒷고기집에 지인들이 모였다. 숯불에 고기가 익자 소주잔도 반달처럼 기운다. 저마다 이야기 한 자락씩 꺼내어 불판에 얹고 이리저리 뒤집어가며 노릇노릇 굽는다. 일주일을 마무리한 노곤함이 의자 등받이 깊숙이 눌러 붙는다. 오늘 화제는 퇴직 후의 일상이다.
일을 그만두면 늦잠부터 실컷 자겠다는 소박한 바람을 말한 이는 늘 불면증에 시달리는 '김'이었다. 세계일주 배낭여행, 마라톤이나 사이클 등으로 자신의 체력을 검증하고 싶다는 '박', 새로운 일에 도전하겠다는 의욕을 드러낸 이는 '장'이었다. 시간이 무한정 주어진다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좋다는 데는 다들 한마음이었지만 어떻게 활용할지는 서로 달랐다.
정년이 코앞인 남편도 얼마 전부터 부쩍 퇴직 후의 생활에 신경을 쓴다.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가 그의 화두다. 소일할 곳이라며 손바닥만 한 밭떼기를 장만하고는 마음 놓인다더니 그마저 녹록치 않는가보다. 가끔 한숨을 뱉어낼 땐 나도 불안해진다. 퇴직 후란 마치 보이지 않는 달의 뒤편으로 가는 느낌일지도 모른다. 거기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퇴직이란 먼 미래일거라 여겼다. 미리 잘 준비해야 한다는 말은 수없이 들었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질 때가 되니 마음이 다급해진다. 아이들이 독립하고 조금 여유가 생기자 시간은 빠르게 사라진다. 한 달이 일주일처럼, 일 년이 한 달 같이 지나간다.
남편은 결혼 후에야 평생직장이 된 사립재단에 교사로 들어갔다. 당시 고등학교는 0교시를 넘어 마이너스교시까지 있었다. 등교지도를 하느라 남들이 곤히 잠든 새벽에 출근했고 야간 자율학습 지도가 끝나는 자정이 가까워서야 퇴근했다.
가정보다 직장이 우선이었던 그를 대신해 집안일, 아이들 돌봄은 내 차지였다. 가장의 늦은 퇴근을 활용하여 과외수업을 시작했다. 학생들 시험기간에는 주말에도 정신이 없었고, 집이 일터라 휴식할 새 없이 늘 일에 치어 살았다. 수업을 끝내고 아이들을 먹여 재우고 나면 퇴근하는 남편의 아내 역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매일 밤 피곤에 쩐 얼굴로 돌아와선 캔 맥주 두어 개에 그날의 뒷이야기를 늘어놓다 금세 곯아떨어졌다.
남편은 삼십 년 넘게 하루의 대부분을 직장에서 보냈다. 방학 때도 보충수업 당번이나 이런저런 연수와 특별활동에 동원되었다.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수업을 했을 때가 그나마 가장 오래 집에 머물렀던 시기다. 이후로 퇴근이 조금 빨라지고 해지기 전에 집에 오는 일이 생겼다. 훤한 대낮에 집에 있다는 게 적응이 안 된다며 불편해 했다. 퇴직 후엔 훨씬 많은 시간을 함께 해야 할 텐데 그땐 어떻게 할까 걱정이 된다.
요즘 나의 시간표는 대부분 그의 일정에 맞춰져 있다. 아이들이 나가고 둘만 있게 되니 되도록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애쓴다. 과외를 그만둔 뒤 시작한 시간제 일도 그의 은퇴에 맞춰 끝내려 한다. 남편의 퇴직은 그래서 우리의 중요한 변곡점이 될 것이다.
달은 자전과 공전 주기가 비슷해 뒤편은 볼 수 없다. 오십여 년 전, 닐 암스트롱이 인류 최초로 발자국을 찍은 곳은 전설 속 계수나무와 토끼가 산다는 앞면이었다. 위성사진으로나마 달의 뒤편을 보게 된 것은 얼마 전의 일이다. 흔히 뒤쪽은 어둡고 부정적인 곳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빛이 없고 어두워서가 아니라 잘 알지 못하는 낯선 곳이라 그럴 것이다.
생의 전면에서 물러난 사람을 일컫는 뒷방늙은이는 노인을 업신여기는 말이다. 은퇴는 모든 실권과 책임을 내려놓고 천천히 늙어가는 과정이다. 뒷짐 지고 한가롭게 거니는 여유를 부릴 수 있다면야 그렇게 불린들 서러울 것도 없겠다. 이제까지 한치 앞도 모른 채 생존전쟁이란 전반전을 치러왔다면 인생후반전은 쉬엄쉬엄 걸어갈 수 있지 않을까.
정년퇴직을 며칠 앞둔 선배의 아내는 남편의 퇴직 앞에 자주 가슴이 답답해진다고 했다. 생활이 더 팍팍해질 것 같아 벌써부터 반찬이 짜지더라고 귀띔을 주었다. 선배는 무사히 직상생활을 마무리하게 된 기념으로 동남아지역에 아내와 ‘한 달 살기’를 갈 거라고 웃었다. 퇴직 십년 차인 다른 지인은 요즘 죽을 시간조차 없이 바빠서 오래 살겠다고 너스레를 떤다. 텃밭을 가꾸며 여러 사회단체 활동을 하느라 현직에 있을 때보다 더 열심히 산다. 건강을 자랑하듯 아이슬란드 빙벽 등반까지 다녀왔다.
달의 뒤쪽으로 가면 우주선은 지구와 교신이 끊긴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어 온갖 미스터리한 음모론과 불온한 서사도 많았다. 몇 년 전, 중국의 탐사 위성 창어4호가 인류 최초로 달의 뒤편에 착륙하더니 최근엔 인도가 달 남극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그동안 베일에 쌓여있던 것들이 조금씩 벗겨지고 있다.
퇴직 후엔 졸음이 덜 깬 얼굴로 허겁지겁 달려가지 않아도 된다. 피곤을 달고 살지 않아도 될 것이고 무엇보다 시간의 고삐에서 벗어나 자의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잘 계획한다면 여유로운 일상 속에서 충만함이 넘치는 나날을 누리리라.
가끔 남편과 퇴직 후의 버킷리스트를 만들어본다. 우선 가족, 지인들과의 만남을 더 자주 갖기로 했다. 삼 년 전부터 시작한 한반도둘레길 걷기를 완주하고,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며, 그가 잘하는 배드민턴을 배워서 부부 복식조가 된다면 좋겠다. 봉사단체에 들어가서 꾸준히 활동하기로 마음먹은 것도 이즈음이다.
이제껏 달의 앞면만 보고 살아왔다. 머잖아 닥칠 현실에 막연한 불안감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기대를 가져보려 한다. 퇴로가 없는 길목에서 타인의 경험을 타산지석 삼는다면 실패도 적을 것이다. 달의 뒤편은 앞쪽보다 굴곡이 덜하고 평평하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도 순탄하게 잘 착륙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퇴직 후의 시간은 뒷고기처럼 상품성은 없어도 맛난 부위일지도.
불콰해진 얼굴들이 한층 풀어졌다. 동병상련을 나눌 사람이 있다는 건 가장 큰 위로다. 서로의 지팡이가 되어주자며 가득 채운 잔을 부딪는다. “달의 뒤편을 위해 건배!” 휘영청 밝은 달이 창으로 빼꼼 얼굴을 들이민다. 뒷고기집 분위기도 한껏 달아오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