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새통 / 하종혁

   이제는 나만을 위한 집을 지어 들어앉고 싶다. 이순이 눈앞이다. 어느 시인은 육십을 ‘쓴소리마저 까탈스럽지 않게 받아들이는 나이’라고 했지만, 새로운 경험을 위해 문밖에 나서기를 주저하게 되는 나이이기도 하다. 이미 가진 자질구레한 것마저 놓아버릴 자유도, 새로운 그 무엇을 움켜잡을 용기도 없이 세월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긴다. 지나간 세월에 사로잡혀 쓸데없이 괴로워하고 닥쳐올 날들을 괜히 근심하며 사는 것은 여전해도, 삶의 굴레가 약간은 헐거워졌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조금 가벼워진다.
  집을 나섰다. 삼척의 댓재를 출발하여 두타산과 청옥산을 거쳐 무릉계곡으로 내려오는 산행길을 잡았다. 동서 분당의 계기를 만든 김효원이 두타산을 금강산 다음으로 아름다운 산이라 했거니와 댓재에서 두타산까지의 시오리 능선은 완만하고 부드러운 흙길이라 산행이 여유롭다. 두타산에서 청옥산에 이르는 장쾌한 십여 리 능선길도 그다지 급하지 않아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 같다. 그렇지만 청옥산에서 무릉계곡으로 떨어지는 하산길은 얼핏 봐서 유장한 듯 했는데 막상 내려오니 아주 가팔랐다.
  십 리도 넘는 험한 내리막길에다 등산로를 조금만 벗어나면 인적이 거의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였다. 땅에 박힌 채 썩어버린 나무의 그루터기가 산재하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덩굴에 온몸을 휘감긴 채 신음하는 나무도 있었다. 아예 뿌리까지 뽑혀 나뒹구는 고목이 여기저기 흩어져있고, 몸뚱이가 이미 푸석해진 나무도 널브러져 있었다. 겉은 멀쩡한데 속이 저절로 썩은 채 서 있는, 이름도 알 수 없는 우람한 나무가 눈에 잡혔다. 그 통나무를 바라보는데 문득 며칠 전에 본 어느 노인의 모습이 겹쳐졌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쑥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지난 주말의 일이다. 오르막길, 내 차 앞에 서 있던 한 노인의 차가 뒤로 미끄러지면서 내 차의 범퍼를 쳤다. 간격도 꽤 벌어져 있었고, 경적을 크게 울려 미리 알렸는데도 기어이 부딪히고 말았다. 정작 기막힌 사실은 그 노인은 자신이 한 일을 알지 못한 채 유유히 출발했고, 내가 십여 리나 뒤쫓아 차 앞을 가로막고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차에서 내려 구부정한 모습으로 다가서는 노부부를 보는 순간,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족히 여든을 넘어 뵈는 할아버지 곁에 선 할머니의 모습이 흡사 내 어머니를 빼닮았던 것이다. 결국 칠이 약간 벗겨진 범퍼를 걱정하는 노인들을 도리어 안심시킨 다음 공손하게 배웅할 수밖에 없었다.
  가파른 능선을 시간 반이나 내려오니 문간재와 신선봉이었다. 신선봉에서 내려다보는 모습이 무릉계곡의 압권이었다. 수백만 년 세월이 빗어놓은 거대한 바위벽 앞에서 나는 말을 잃었고, 쌍폭포, 용추폭포 등 즐비하게 늘어선 폭포들에게 넋을 빼앗겼다. 신선이 노닐었다는 옛글이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다. 고려의 문인 이승휴가 이곳에 머물며 『제왕운기』를 썼고, 수많은 시인 묵객이 노닐었던 이유를 알 만하다. 계곡 입구의 무릉반석은 웬만한 학교의 운동장 넓이만 하다. 이름이야 중국의 무릉도원에서 땄겠지만, 혹 중국에 무릉도원이 있다 한들 이보다 더한 선경은 아닐 것이다.
  그 통나무를 가만히 떠올렸다. 이미 썩어서 구멍이 생긴 그 나무는 이제 제 생을 다하고 본래 자신이 온 그곳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성싶었다. 비록 자신의 삶은 다했을지언정 제 몸을 장수하늘소의 산란 장소로, 그리고 애벌레의 요람으로 기꺼이 내어주고 있었다. 그러면 그곳은 까막딱따구리의 훌륭한 사냥터가 되기도 할 테고, 버섯과 이끼들에게는 풍성한 영양의 공급처가 되기도 하겠지. 어쩌면 족제비와 청설모의 안온한 은신처가 될지도 모르지.
  스산하게 늙어가는 중년의 한 사내가 계곡의 초입에 서 있다. 사람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 에둘러 말한 이도 있지만, 그 어떤 과실도 영글면 마침내 떨어지고 마는 것을. 죽음만이 삶에 진솔한 생동감을 부여한다. 그러므로 모든 생명에게 죽음은 축복이다. 하여 이제는 늙고 병들어 초라해진 내 어머니의 모습이 그 구새통과 같은 형상이라 하더라도 나는 슬퍼하지 않을 수 있다. 이제는 삭아 푸석해진 나무둥치까지도 분별하지 않는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겠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나의 삶도 그렇게 자연스레 오고, 또 가는 것일 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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