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혹 / 송명화

 

 

누구나의 가슴에도 빙하는 흐른다고 하였다. 가슴속 빙하는 지하수로 흐르다가 덮개가 단단하지 못한 부분을 찾아 용출한다. 차게 흐르던 내면의 온도가 외부의 온기를 느끼고 누그러지면 비로소 안도의 숨길을 찾는 것, 마음속 상처는 그런 것일까.

기묘한 뿌리혹들이다. 천리포 수목원에서 만난 분화구들을 어찌 설명할까. 연못가를 걷는 오릿길을 돌아 나오다가 낙우송 무리를 만났다. 수사처럼 엄숙하게 도열해 있는 나무둥치 아래에 생경한 것들이 눈길을 끌었다. 판타지 영화에서 보던 가상제국의 축소판인가. 땅에서 솟아나온 수많은 돌기들이 수석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앉아서 세운 무릎처럼 여기저기 불쑥 솟은 기이한 것들, 뿌리도 아닌 것 같은데 땅에서 자라 올라온 종유석 형상이다. 푯말을 보니 식물의 뿌리 호흡을 돕기 위해 생겨난 기근이라 했다.

사춘기를 맞은 조카의 여드름처럼 터트려야 할 에너지가 툴툴대며 불쑥이는 것만 같다. 화구 폭발처럼 여드름이 솟고 나면 몸은 차분히 성장의 방향을 잡지 않을까. 성숙으로 가는 길은 우둘투둘한 산길이기도 말끔한 페이브먼트이기도 하지 않던가. 요모조모 살피며 관심을 기울이는 내가 부담스러운지 다들 돌아앉은 모양새다. 정체성을 의심받는 고통을 알아버린 것일까. 주변인의 설움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애잔함이 일어 이곳, 천리포수목원의 낙우송 앞에서 주저앉는다. 오면서 어느 시인의 부음을 들었던 까닭이다.

시인은 낯빛이 검었다. 말수가 적고 진중하여 뵐 때마다 조심스러웠다. 새까만 후배인 내게도 예를 다하시는 모습과 나직한 목소리의 울림 때문에 그분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내 매무새를 점검하곤 하였다. 단풍들기도 전에 시들어가는 낙엽처럼 그림자 드리운 안색이 걱정되었다. '예민한 감성과 투명한 직관의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그가 풍기는 묘한 페이소스는 무겁고 어두웠다. 자리를 함께 한다면, 술 한 잔에도 그의 내면에 찬 얼음물이 분수처럼 솟구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우울의 이유를 아는 데 제법 많은 시간이 걸렸다.

퍼런 멍 빛깔의 삶이란 그런 것일까. 그는 중학생 아들을 왕따 사고로 잃었다고 한다. 본인이 근무하는 중학교에서 일어났던 일이라 했다. 교사로서의 자존감도, 아버지로서의 자부심도 허공으로 낱낱이 흩어져버렸고, 남은 것은 짙은 회한뿐이란다. 지인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듣는 순간 머리가 아파왔다. 치이고 패인 껍데기로만 남게 된 남자라니. 숨소리까지 슬퍼 보이더라니. 근력을 소진한 사람처럼 가라앉아 있더라니.

주렁주렁 온몸에 관을 매달고 하루하루 고통을 씹으며 연명하는 중환자처럼 그는 가까스로 살아내고 있었던 것 같다. 얼마나 외치고 싶었을까. 얼마나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을까. 낙우송 기근을 가만히 쓰다듬어본다. 까까머리 중학생의 머리통같이 반들거리는 기근의 꼭대기에 때늦은 조사(弔辭)를 얹는다.

"이제 평안하시지요" 왠지 경건해진다. 나를 내려다보는 낙우송에게 나는 얼마나 작은 존재일까. 낙우송은 높이가 반백 미터까지 자라는 교목이다. 거기다 팔백 년에서 삼천 년을 산다고 알려진 장수나무다. 사람은 이 나무를 우러러보고, 나무는 시야를 넓혀 세상을 살핀다.

온갖 새와 미물을 품는 넉넉한 품을 가졌고, 침엽수이면서도 고운 단풍을 보여주는 미적 감각이 남다른 식물이다. 우뚝 솟아 대기를 마음껏 숨 쉬면서도 따로 호흡뿌리를 가져야 하는 것이 왠지 안쓰럽다. 살아남기 위해 대를 이어가며 환경에 적응하고자 몸부림친 과정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렇게 되기까지의 먼먼 진화 과정이 시인의 삶을 상관물로 삼아 영상을 돌린다.

시인이 호흡한 세상은 어떠했을까. 분노가 들썩일 때, 바깥으로 뛰쳐나오는 울분을 잡아맬 방법은 없었겠지. 몇 겹의 울타리로 단속해 봐도 무의식의 천장을 뚫고 분출하는 슬픔을 어찌할까. 그는 그것들에게 숨구멍을 내주었던 것 같다. 진물을 말리고 까들까들하게 아물 수 있도록 속을 조금씩 내보이기 시작하였다. 시작(詩作)은 그의 평생의 업이 되었다.

카메라에 검은 천을 씌우고 순간을 기록하던 사진사처럼 삶이라는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그는 암흑 속에서도 셔터 끈을 계속 잡아당겼다. 예술로 승화된 치유의식을 치르느라 바쁜 그를 나는 멀리서 속으로만 응원하였다. 흉터조차 세상을 보는 눈이 되고, 살아가는 기운을 마시는 코가 되기까지 그의 족적이 눈물겹다. 그래서일까. 그의 부고가 안타까웠지만 놀랍지는 않았다.

내 방에 걸린 고흐의 그림 속에도 낙우송 같은 나무가 있다. 화가는 말년에 우울증을 앓았다. 병원의 침대에 누워 창을 내다보면 유럽 낙우송이라 할 만한 사이프러스가 보였다. 수직으로 높이 뻗어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그 나무를 보고 그는 삶과 죽음이 분리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유럽인들이 죽음의 상징으로 여기는 나무에서 그는 삶을 보았던 것이다.

소용돌이와 파도 모양의 강력한 붓 터치들이 에너지의 흐름으로 나타나고, 살고자 하는 염원이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정신병원에서 보낸 생의 마지막 삼 년 동안 그를 위로하고 자아를 투영하게 했던 고흐의 그림 속 낙우송은 볼 때마다 내게 텔레파시를 보낸다.

하늘까지 닿을 듯 키를 뽑아내는 나무는 재크의 콩나무이기도 하고, 선녀를 데려가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준 두레박이기도 하다. 어릴 적 나를 따돌리려고 그렇게 노력하던 친구가 있었다. 전학 온 곱슬머리 아이였는데 무슨 까닭이었을까. 그 아이의 사주를 받은 몇몇 아이들이 시간이 날 때마다 나를 괴롭혔다.

낙서를 하고 헛소문을 내고 길게 땋은 내 머리꼬리를 잡아당기거나 주먹다짐을 하고 도망가기도 하였다. 벗어나기 힘든 굴레였고 상처였다. 자존심의 부채로 부운 눈을 가리고 엄마에게도 이르지 않았던 그 일이 세상으로 나선다. 시인의 아들과 내 속의 어린아이가 손을 잡고 낙우송 기근들 사이에 나란히 선다.

"도움을 청하지 그랬니? 용기 있게 나서지 그랬니? 잊자꾸나. 그리고 깃털처럼 가벼워지려무나" 내 생각의 방에서 이제 시인도 그림 속 낙우송이 된다. 가을이 오면 낙우(落羽)를 볼 수 있겠지. 고급스러운 갈색 깃털들이 세상을 한 바퀴 날고, 드디어는 상처에 내려앉을 터이다. 깃털이불이 기근을 감싸고 겨울 모진 추위를 막아주며 새봄을 기약하는 동안에 땅은 술 익듯 향기로운 자양분을 빨아들이고, 하늘은 더 가까워질 낙우송의 우듬지를 내려다보리라.

상처가 숨을 쉰다. 숨구멍을 가진 상처는 아물고, 그제야 낙우송은 둥근 열매를 맺는다. 나무도 사람도 한결 성숙해지는 시간에 나는 시를 읽고 싶다. 낙우송이 된 시인의 흔적을 시집 속에서 불러내어 함께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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