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슬픔 / 노상비

 

 

배들이 듬성듬성 떠 있는 마산 앞바다, 하늘까지 온통 파랗다. 가만히 바라본다. 바다의 하얀 포말을 바라보는 나의 몸과 마음이 푸른 슬픔으로 가득하다. 그녀가 다가온다. 내 앞에 와 마주 앉는다. 강희…. 맘껏 울고 싶었는데 저녁노을이 아름다워서인가 왠지 마음이 평온해진다.

잘 지내고 있니?

나는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내 손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소식이 궁금해서 전화를 걸었다. 2년 만이었다. 그런데 전화를 받지 않았다. 왜일까. 궁금한 마음에 그녀 남편의 전화번호를 다시 눌렀다. “강희가 지금 없어요.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전화기를 잡은 두 손이 마구 흔들렸다. 위암으로 고생하다가 떠났다는 것이다. 그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이 안 났다.

"마산 앞바다에 뿌렸어요"

그녀가 그리울 때마다 마산 앞바다가 떠올랐다. 그녀의 고향 앞바다이다. 그런데도 가기가 힘들었다. 어느 면으로는 두려웠다. 마음속으로 수없이 뒤척이다가 마침내 용기를 냈다. '이 마음이 끝나려면 마산 앞바다를 가야만 한다' 마산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울렁거리는 마음을 달래며 과거로 돌아갔다.

대학 입학 때부터 시작된 교내 시위는 해가 거듭되어도 끝나지 않았다. 어느 날, 합동 수업 시간에 우리는 수업을 거부하고 강당으로 모였다. 하나둘 울분을 지닌 채 모였지만 아무도 앞장서지를 않았다. 어느 순간 강당이 꽉 찼다. 그때 강희가 앞으로 나갔다. 그녀는 조동진의 '작은 배'라는 노래를 불렀다. 아주 작은 소리로 부르던 노래는 합창이 되어 강당을 울렸다.

작은 배가 있었네

아주 작은 배가 있었네

작은 배로는 떠날 수 없네

아주 멀리 떠날 수 없네

이 가사를 부를 때는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교정 밖으로 나갔다. 대열의 앞에는 그녀가 있었다. 우리에게 ‘작은 배로는 안 돼. 작은 배를 타고는 저 희망의 땅으로 갈 수가 없어.’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누군가 그녀의 남자 친구가 이미 수감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강희를 다시 만난 것은 몇 해 뒤 도서관에서였다. 공부한다고 도서관에 왔는데, 우리는 만나면 복도 창가에서 머리를 맞대고 남자 친구들 이야기만 했다. 그녀도 나도 녹록하지 않은 사랑에 열중해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의 위로와 지지가 필요했던 시기였다. 그때 그녀의 사랑은 보기만 해도 눈에 통증이 왔다. 남자 친구를 면회 가는 어두운 뒷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어느 날, 강희가 내 자취방으로 왔다.

"몸이 아파"

"잘 왔다. 좀 쉬어라. 내가 밥상 차려올게"

그런데 밥을 못 먹었다. 위가 아프다는 것이다. 그렇게 2박 3일을 내 자취방에 있다가 갔다. 자다가 깨어 보면 강희는 컴컴한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잠을 못 잤다. 나중에 알았다. 그날 공판에서 남자 친구가 사형을 선고받았다는 것을….

바닷가를 걷는다. 고즈넉한 노을이 아름답다. 그리움을 바다에 모두 던지고 나니 노을 속에 마산 앞바다가 친근해진다. 체취가 느껴지는 듯하다. 그녀의 품으로 돌아온 느낌이랄까. 잘 웃던 모습도 떠오른다. 그 순간 무슨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는 바다 저편에서 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후회 없어'

훅하고 가슴이 떨려왔다. 나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 목소리가 그녀의 것인지 내 안의 울음인지.

강희의 결혼 청첩장을 받았던 순간이 생각난다. 한참을 청첩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잘했어' 나 혼자 이야기했다. 희망 없는 사랑은 저쪽 편에서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녀가 새로운 사랑을 선택한 후에 우리는 자주 만날 수 없었다. 모든 무대에서 사라졌다. 동창회에도 나오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끝까지 지키지 못해 일생 죄인처럼 숨소리도 안 내고 살았다. 아마 내 마음이 아픈 것은 그 부분인 것 같다. 어쩌다 만나도 우리는 지나간 시절은 서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숨이 가쁜 삶 속에 잠깐 만나 손을 잡고 웃었을 뿐이다.

그래도 한 번쯤 물었어야 했다. "네 위는 괜찮니?"라고. 그녀는 사랑을 지키느라 위병을 앓았다. 수감된 남자 친구를 만나고 오면 늘 몸이 아팠다. 음식을 먹고 나서 항상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러더니 결국 위암으로 떠나버렸다.

한참을 해변에 앉아서 바다의 바람을 고스란히 맞는다. 후회가 없다니, 편안한가. 그렇게 생각하니 나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후회 없으면 됐어'

바다는 밀려오는 어둠에 그 빛이 점점 사라져 간다. 이제 푸른 바다의 슬픔은 끝나간다. 그랬으면 좋겠다. 나는 마산 앞바다를 떠나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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