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신는 시간/ 김미연

 

 

 뒤축을 바로 세우지 않고 신발을 끌고 나간다. 무지외반증에다 발톱이 살을 파고들어서이다. 무단히 신발을 경멸한다. 신어서 편하고 신고 벗기에 번거롭지 않은 신발을 찾아 헤맸으나 찾을 수 없다. 우주를 누비는 오늘날 몸을 편안하게 해주는 신발 하나 만들 기술자가 없을까.

 

  새 운동화를 사면 뒤꿈치를 벌겋게 까놓기 일쑤고 한복에 어울리는 당해는 종일 발을 옥죄어 남몰래 벗었다 꿰었다 하며 발가락을 꼼지락거려야 한다. 부츠는 신기만 하면 따뜻하게 발을 감쌀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발이 시리긴 마찬가지고 발등을 눌러 불편했다. 슬리퍼는 어떠냐고? 그 역시 바닥이 얇아서 휘적거리고 안정감이 없다. 조세핀이 신었던 슬리퍼는 아주 볼이 좁고 뒤축이 없어 여성의 활동을 가두었다고 한다. 멀리 걷거나 예의를 차려야 할 땐 부적합하다.

 

 출입구에서 엉덩이를 퍼질고 앉아 끄집어 올리지 않아도 되는 부츠는 없는가. 아픈 허리를 숙이고 쭈그러진 자세로 우아한 부츠를 신어야 하는가. 뒤축을 세우고 끈을 매기 위해 손가락까지 써야 하는가. 아무리 비가 내려도 물이 들어오지 않는 예쁜 하이힐은 없는가. 낭만은 커녕 예인의 자존심을 구기고 나도 덩달아 축축해진다.

 

 축제장에 갔다가 발이 아파 버려진 박스를 깔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모두 다른 신발을 신었다. 그들은 속삭이며 간다. 하나도 같은 사랑이 없듯 모두 다른 인생이다. 하지만 나를 만족시킬 말은 아니다. 시리아의 작가 퍼블리리우스도 불만이 많았던 모양이다. 모든 발에 다 맞는 신발은 없단다. 150여 년 전 프랑스 여성들은 부츠를 신기 위해 스무개의 구멍으로 끈을 넣고 빼며 묶었다 한다. 발바닥이 가려웠다면 벗는 동안 얼마나 진저리를 쳤을까.

 

 내 키가 어른들의 아랫도리에 머물 때다. 처음으로 버스를 타는데 너무 깨끗해 방에 들어가듯 신을 길바닥에 벗고 올랐다. 자갈길을 흔들며 가는 중간중간 사람들을 태우니 어느 덧 만원이었다. 어른들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할때 하얀 종아리 두 개가 보였다. 그 종아리의 맨발은 못 위에 올려진 게 아닌가. 자꾸 밀려가면 나도 저 못 위에 맨발이 얹힐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지금 생각하니 짧은 치마에 하이힐을 신었던 모양이다. 차에서 내렸을 때 엄마는 신발을 잃어버렸다고 야단을 쳤다. 못 위에 맨살이 두려워 울음을 내질렀다.

 어린 날 버스에서 만난 광경은 바로 먼 훗날의 예고편이었을까. 바로 위의 소나무처럼 발가락이 틀어지고 굽었다. 세상이란 자동차 위에서 밀리고 밀려 결국은 뽀족한 못 위에 얹혀 살아가는 것과 다름이 없다. 새 신을 사면서 발의 근심이 싹 가시길 바랐으나 신어보면 편치가 않다. 불편을 돈을 주고 산 것 같아 후회막심이다.

 

 그렇다고 맨발로 다닌다는 생각은 할 수 없다. 어떻게 하든 목적지까지 모시는 충신이지 않는가. 맨발로 다니는 종족이 있다고 하나 위험하다. 발을 보호해 주는데 이것 말고 무엇이 있을까. 자동차는 현관문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양말은 나름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

 신발은 참으로 잘 고안된 창작품이다. 신성한 모성인 대지에 살갗이 직접 닿아 진화했다면 땅을 만만하게 보고 더욱 교만했을지도 모른다. 이를 알아차린 원시인은 땅과 사람 사이에 칸막이를 생각해 냈을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신발은 옷에 맞추어 고를 수 있는 재미를 준다. 개성 있는 디자이너에겐 부와 명예도 안겨 주었겠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배가 아파 고통을 호소하면 낡은 가죽 신발의 앞부분을 베어 먹였다. 몽골에서는 그가 신던 신발을 없애버리면 배가 낫는다고 했다. 문화를 풍성하게 만드는 요소의 하나다.

 

 신발을 신을 때마다 나는 서두르는 버릇이 있다. 구부려 신기 예사다. 어른들은 뒤축을 구부려 신으면 수명이 짧다고 했다. 고단한 중에도 스토리텔링이 되어 사람살이를 풍성하게 했으니 이 또한 공로다.

 

 신발은 웃음과 울음이 고단함과 씁쓸함이 오롯이 담긴 한 채의 집이다. 먼 길을 동행하는 나룻배다. 삶의 색깔과 냄새와 영혼을 사려놓은 삼광주리다. 그러기에 마지막 가는 길에 꼭 챙기는 유품이다.링컨 기념관에서는 링컨이 암살되었을 때 벗겨진 부츠를 거액을 주고 사들였다 한다. 우리도 임의 신발을 챙겨 빈소에 모신다.

 

 바람에 머리칼을 날리며 걷는데 죽비소리가 날아든다. 끌어 올리고 뒤축을 세우며 갈 방향으로 돌려놓는 일은 차분히 생각하고 출발하라는 쉼표란다. 찬물 바가지에 띄워놓던 버들잎이란다. 한 번 더 두드리라는 돌다리이기도 하겠다. 숫눈이 꼬드기더라도 뒷사람에게 남겨질 발자국을 함부로 내딛지 말라는 뜻도 있겠다.

 

 신발 신는 시간에 겸허를 배운다. 아무리 거들먹거리는 사람이라도 신발을 신을 때만큼은 고개를 숙인다. 꼭 하나쯤의 불편을 담은 신발의 탄생은 신神이 내린 미션인지도 모르겠다. 구부리지 않고 뻣뻣하게 선 채로 쉽게 신는 신발을 찾아 헤매며 무슨 손해라도 보듯 투덜댄 것이 부끄럽기 짝이 없다.

 다시 천천히, 운동화 끈을 매고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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