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숙
재미수필가
미국은 자동차가 없으면 불편한 나라다.
땅이 넓어 그만큼 활동 반경의 폭이 펼쳐져 있어 한국처럼 대중교통이 발달할 수 없는 여건이라 차가 없으면 기동력이 떨어진다.
주택가와 상가구역이 분리되어 우유 한 통을 사러 상점에 가려면 차를 이용해야 하기에 차량 보유율이 성인 1.3명당 1대일 정도로 필수다.
러시아워에는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길이 막히겠지만 LA는 6년 연속 교통체증이 가장 심한 도시로 뽑힐 정도로 복잡하다.
출근 시간에 10차선 도로를 꽉 매운 채, 꼬리에 꼬리를 문 자동차를 보면 실감이 난다.
길에 걸어다니는 사람보다 차가 더 많다면 과장일까.
이민자들은 미국에 오면 운전면허증 취득이 첫 번째 과제다.
1980년대 초, 여자가 운전한다는 것이 흔치 않던 시절이라 설레고 흥분했다.
달달 외운 예상문제로 필기시험은 단번에 붙었는데 운전 실기 테스트에서 세 번째에 겨우 합격을 한 후 30년 넘게 운전을 한다.
그동안 크고 작은 사고를 겪었고, 교통위반 티켓도 받았다.
그중 아직도 억울하게 생각되는 티켓은 스톱 사인(STOP Sign)에서 정지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집 앞 골목길, 사거리에 있는 ‘4Way STOP’ 사인 앞에서 차를 멈추었다.
평상시처럼 ‘하나 둘 셋’을 마음속으로 세고 다시 출발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경찰차가 경고등을 켜고 내 차 뒤를 따라왔다.
차를 세우고, 유리창을 내린 채 기다리니 경찰이 다가와 운전면허증과 차량등록증 그리고 보험증을 요구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스톱 라인(Stop Line)에서 완전히 정지하지 않고 속도만 슬쩍 늦춘 후 지나갔다는 것이다.
분명히 3초 멈추었다고 했지만, 경찰은 티켓을 내밀며 억울하면 법정에 나와서 항의하란다.
법원에 가봤자 내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주위의 충고에 포기하고, 벌금에 교육비까지 거의 500불이 들었다.
미국의 역마차 시대부터 내려온 이 교통법규는 신호등이 없는 사거리에서 어느 방향의 차든지 스톱 라인에 먼저 도착한 차에게 우선순위(right of way)가 있다.
판가름하기 어려울 정도로 동시에 멈추었을 때는 보통 운전자끼리 손짓으로 순서를 정한다.
뒤에 차가 밀려도 개의치 않고 한 대씩 순차대로 지나가는 게 불문율이다.
그 이후부터 정지를 완벽히 한 후 좌우를 둘러보고 내 차례를 기다린다.
자신의 순서를 지키지 않는 것은 사고의 위험을 가져올 뿐 아니라 경찰에게 걸리면 비싼 벌금을 내야하고, 보험료도 올라가기에 이래저래 조심한다.
왕복 8차선 도로의 신호등이 고장 나도 운전자들이 차량의 흐름을 이끈다.
한쪽의 교차로 정지선에 서 있는 차들이 가고 나면 그다음 방향의 차들이 움직인다.
누군가의 지시가 없어도 묵시적 약속에 따라 천천히 질서정연하게 운전하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
어릴 적부터 보고 배웠기에 자연스럽다.
일 초 일찍 간다고 세상이 바뀌거나,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다는 상식을 그들은 알고 있다.미국인이 교통질서를 준수하는 것을 보면 자율성이 높다는 것을 느낀다.
그 첫 번째가 스톱 사인을 잘 지키는 것이다.
‘우선멈춤’이 아니라 ‘일단정지’다.
소방차와 구급차 또는 경찰차가 요란하게 경고등을 번쩍이며 사이렌을 울리고 다가오면 모든 차선의 차량이 도로의 가장자리로 움직여 가운데 길을 내준다.
구급차는 환자를 병원으로 옮기기 위해, 경찰차는 범죄 현장에 빨리 가야 하므로, 소방차는 911의 지시를 받고 화재나 사고현장에 먼저 도착하는 차량이다.
이때 우물쭈물하며 길을 내주지 않으면 주위 차량이 경적을 울리며 질타를 한다.
한국에서는 경찰차가 항상 경고등을 켜고 다니지만, 미국에서는 급할 때만 사용하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골목길에 통학버스가 앞에 있으면 속력을 줄이는 것이 정석이다.
노란색의 버스가 멈추면서 ‘STOP’이라고 쓰인 팔각형 표지판이 버스 옆부분에서 날개처럼 펼쳐지고 빨간불이 깜빡인다.
이때는 같은 방향뿐 아니라 반대쪽에서 오는 차도 모두 정지해야 한다.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서다.
얼마 전 한국 신문에 난 기사를 읽었다.
국회가 공동주택에 소방차 전용구역 설치를 의무화하고, 전용구역에 주차하거나 진입을 가로막으면 100만 원 이하 과태료를 물리도록 결정했단다.
한국은 미국과 지리적으로 다르다.
땅이 넓지 않아 주차공간이 부족하고 길도 좁기에 이곳처럼 응급차가 급하게 달려와도 비켜주기 쉽지 않겠지만 도와야 하는 손길을 위해 필요한 조처라는 생각에 반가웠다.
하루의 절반을 차 안에서 보낸다는 표현이 지나치지 않을 만큼 운전은 생활과 연결되어 있다.
멈춰야 할 때를 알고, 양보하는 미국인의 기본 상식이 교통문화를 바꾸고 편안하고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