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 남매 중 장녀인 큰 언니가 아프다는 연락을 받았다. 자궁경부암인데 한 달 정도 치료를 받으면 곧 좋아질 것이라고 한다. 셋째 언니말로는 다른 곳으로 전이가 되었지만 착한 암이라 치료를 잘 받으면 완치가 될 것이라 했다. 암에도 착한함, 나쁜 암, 독한 암, 순한 암, 못 생긴 암, 잘생긴 암 이런 구분이 있는가.


큰 언니와 나는 14살 차이가 난다. 내가 어릴 땐 언니는 뜨개질을 해 입히기도 했다. 아직도 언니 떠 준 빨간색 긴 코트는 제일 예쁜 옷이다. 육영수 여사가 어린이 대공원을 만들고 그 개관식 행사에 학교 대표로 참석했는데 언니가 그날 아침 나에게 입혀 주었다. 꽈배기 무늬가 앞부분에 길게 늘어지고 반짝이는 금빛 난추가 마음에 들었다. TV에서 보던 나라의 최고 여성인 영부인이 빨간 코트를 입은 내 모습을 봐주기를 바라며 까치발을 하며 눈을 맞추려 애쓰던 기억이 난다. 엄마 같은 언니였다. 나머지 여섯은 순둥이인데 큰언니는 별종이라고 친척들은 말했다. 강한 성격인 언니는 동생들 위에 군림을 했다. 나에게 다정하다기보다 무서운 언니였다. 멋쟁이로 꾸미기 좋아해 나이보다 10년이 젊어 보여 외국인들은 우리를 쌍둥이로 볼 정도다. 음식솜씨가 일품이라 뚝딱뚝딱 한상 차려내는 것은 일도 아니다.

 

언니가 미국에 여행으로 왔다가 눌러앉았다. 언니는 엄마가 돌아가실 때까지 돌봐 드리고 싶다는 정당한 이유를 댔지만 사실 엄마와는 만날 때마다 삐꺼덕 거렸다. 엄마에게 쌀쌀맞고 퉁명스럽게 대하는 언니 때문이다.

 


이혼 후 언니가 사는 아파트에 얼떨결에 들어가 2년 정도 살면서 나는 한 동안 언니가 조정하는 퍼펫 인형 같았다. 언니가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어릴 적부터 칠 남매가 자라며 질서를 강조하셨던 아버지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하극상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가끔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말라고 했는데……하며 언니가 나를 빗대 말할 때는 이혼한 것보다 언니네 얹혀사는 걸 후회하기도 했었다. 내가 뭘 더 해야 하나. 요구사항이 있을 때마다 신세타령처럼 내뱉는 언니의 말은 내 마음을 꼭꼭 지르는 바늘이었다. 그냥 말했어도 언니 말을 따랐을 텐 데 왜 그랬을까. 불법 체류자인 자신의 상황에 의지할 데라고는 막냇동생밖에 없는 것은 알지만 강한 자존심 때문에 일부러 세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결단력이 없는 나를 훈련시키기 위해서 그랬을 까.


영주권이 없으니 언니가 나이가 들어 아프면 어쩌나 항상 마음의 짐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팟 타임 일에 지친 언니가 아들의 성화에 10년의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2년 전에 돌아갔다. 한동안 미국이 그립다고 다시 오고 싶어 하더니 이제 포기를 하고 서울에서 잘 살고 있다. 지난번 서울 방문 길에는 한국의 복지시설과 노인 우대가 미국보다 좋아 살기 좋다고 해서 마음을 놓았었다.

그런데 아프다니. 이제 자리 잡고 살만하니 암이란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 그동안 언니한데 갖고 있던 응어리진 감정들이 나를 괴롭혔다. 언니를 두려워했던 마음보다 믿고 의지했던 사랑이 더 컸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증의 사이. 너무 사랑하기에 반대로 준 상처가 깊은.


70살이 넘은 울 큰언니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얼른 자리 털고 일어났으면 좋겠다. 언니가 끓여주는 김치찌개가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