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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만 밤을 일시에 여백으로 만들어 버리는 기묘한 마술이여. 조정훈의 '밤 고기잡이' 사진들은 불 빛 한 점만으로 칠흑같은 어둠을 여백으로 만들었다. 
  여백이란 하얀 백지가 아니다. 여지껏 지녔던 하얀 여백의 고정 관념을 일시에 무너뜨린다. 또한, 점 하나라도 찍혀 있어야 남은 공간이 여백이 된다는 것도 알았다. 그저, 비워있다고 해서 여백이 되는 게 아님을 본다.
  예술마다 여백을 강조한다. 고매한 책마다 여백을 가지라고 타이른다. 여백은 형태와 색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제 존재만으로 그 가치를 드러낸다. 색채를 지니지 않으면서도 늘 존재 가치를 느끼게 해 주던 내 그림자보다 한 술  더 뜬다. 형태와 색을 버린 존재. 없을 '무' 자체가 실존이라니. 참 불가해한 이야기다. 
  우리는 스스로 형체를 드러내고 화려한 색채를 발하며 얼마나 제 존재를 부각하려 발버둥치는가. 허명을 쫓아 바빴던 나날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배경이 되기보단 스포트 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이 되려는 헛된 몸짓들은 어떠했던가.  그건 모두 가로등 불빛에 모여 내일이 뭔지도 모르고  윙윙대던 하루살이 모습이 아니었을까.
  모래펄에 꾹꾹 눌러 쓴 내 이름. 파도가 푸른 너울 쓰고 따라와 조용히 빗질해 준다. 새하얀 눈길 위에 비틀거리며 새겨 놓은 내 발자욱도 하얀 눈발이 밤새 내려 말없이 지워 준다. 우리는 제 존재를 알리려 그토록 눈물겨운 몸짓을 하건만, 자연은 그게 아니라며 계속 빗질을 한다. 자연은 진정 글자 없는 경전이요, 말 없는 로고스다.
  여백처럼, 우리도 이미 존재 그 자체만으로 귀중하고 소중한 실존이 아닐까. 우리의 중심에 놓인 불빛, 그 한 점 명료한 불빛으로 인하여.
  칠흑같이 어둔 밤. 짙음을 더해 가는 밤따라 내 생각도 깊어진다. 여백이 된 밤과 밤을 여백이게 해 준 불빛을 묵상한다. 주님과 나의 관계도 이러하지 않을까 싶다. 문득, 영세 교리문답 첫번째 질문이 떠오른다.  
 
  -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사느뇨?
  - 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삽니다. 
 
  삼십 여 년 전에 신부님과 주고 받았던, 그러나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질문과 응답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영광'이란 말 앞에서 잠시 머뭇댄다. '주님의 영광'이란 무엇일까. 그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소시절적 엄마에게 했듯이, 순진무구한 마음으로 그 분을 기쁘게 해 드리면 되는 걸까. 고개를 갸웃거린다.
  사진을 다시 눈 여겨 본다. 여백이 된 까만 밤을 본다. 그리고 동구 밖 호롱불같은 작은 불빛을 응시한다. 그 불빛 속에 보일듯 말듯 실루엣으로 잡혀 있는 한 남자의 뒷모습을 본다. 그 너머로, 고기 잡으러 나왔다가 뽑힘 받아 인간 어부가 된 베드로가 보인다. 
  어디서 생긴 욕심일까. 언감생심. '주님,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가슴 한 켠에서부터 내밀한 청원 기도가 터져 나온다.
  달을 닮았는가, 잠들지 못하고 있는 이 밤. 시계가 한시 이십 오분을 가리키고 있다. 밤은 밤이다. 까만 여백의 밤이다. 형태도 색채도 내 세울 게 하나 없는 난, 주님 불빛 앞에서 까만 여백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