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 모르스 부호로도

       세상은 통한다는데


리 - 리발소로 쓰는 리북

       이발소로 읽는 이남


스 - 스스럼 없는 대화는

       언제쯤이나 가능할꼬


시조 강의하는 선생님께서 '모리스'란 이름 하나를  던져주며 뜬금없이 삼행시조를 지어 보란다.

놀리는 건지, 떠 보자는 건지, 아니면 어떻게 나오나 궁금했는지 알 수가 없다.

한국 사람 이름으로는 시조 공부삼아 많이 지어 봤지만, 외국 사람 그것도 생면 부지의 사람 이름을 가지고 지어 본 적은 없다.

이건, 완전 출제위원의 기발한 아이디어요 회심의 문제다.

'모'는 몰라도 '리'로 시작하거나 '스'로 시작하는 말이 쉽지도 않지만 전체적인 주제 흐름을 타야하니 난감하다.

그래도, 학생이 시험지를 받았으면 점 하나라도 찍어서 내야지 수표도 아니고 백지 답안을 낼수는 없지 않나.

일단은,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을 모아 본다.

주어진 첫자를 충실히 지키되, 1연과 2연 그리고 3연이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며 일관된 주제로 흐름을 잡아주는 게  중요하다.

모리스란 이름에서 첫번 째 연상되는 단어는 '부호'였다.

도스 똔똔.

뜻도 모르면서 모르스 부호라 하면,  제일 먼저 이 '도쓰 똔똔'이  옛날부터 떠오른다.

경상도 발음에 어릴 때 오빠로부터 주어 들은 말이라  이런 모르스 부호가 있는 지 없는 지도 모르겠다.

일차적으로 '부호'라는 단어가 떠오르니, 그 다음은 '소통'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모르스 부호는 서로의 소통을 위하여 만든 약속의 부호가 아닌가.

최대한의 속도를 줄이기 위해 짧은 발신 전류와 긴 발신 전류만으로 전송하는 비상 통신 수단이다.

연상은, 담쟁이 잎이 꼬리를 물고 뻗어가듯이 세 번 째 연상으로 확장되어 간다.

소통의 부재.

그 비극의 역사적 현장이 바로 남과 북, 우리의 조국이 아닌가.

7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며, 남과 북의 언어는 얼마나 달라져 왔는가.

믿거나 말거나, 전구를 '부랄'이라 하고 샹데리아를 '떼부랄'이라고 한다지 않는가.

정말이라면, 우리는 상스러워서라도 다 도망갈 것이다.

북한에서는 태연히 상용되는 말이 우리에게는 욕으로 들리는 그 언어의 괴리가 서로를 더욱 멀리 떼놓고 있다.

언어도, 마음도, 생각도 각기 다른 우리.

젊은이들 중에는 통일 무용론까지 들먹이고 있다.

저거 꺼 저거 먹고, 우리 꺼 우리 먹고 그저 조용히 마음 편히 살자는 주장이다.

국방비를 문화비로 돌리면, 우리 삶이 얼마나 윤택해지겠는가란 의견으로 확장된다.

그러나, 우리가 어디 남인가.

더더욱 북한 주민은 우리에게 '아무나' 즉, anybodies가 아니다.

천만 가족이 서로의 생사를 모른 채,  통한의 세월을 살아오고 있다.

아마도,  알 만한 사람은 오 준 전 유엔대사가 한 말을 다 기억할 것이다.

2014년 12월 22일, 북한 인권 문제가  유엔 안보리에서  정식 안건으로 채택되었을 때,  기쁘기보다 오히려 마음이 무겁다고 말한 오준 대사.

그의 심경이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대한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삼행 시조로 돌아와서 생각을 정리해 본다.

부호, 소통, 남과 북.

이 재료로  물꼬를  튼다.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모 - 모르스 부호로도

       세상은 통한다는데


리 - 리발소라 쓰는 리북

       이발소라 읽는 이남


스 - 스스럼 없는 대화는

       그 언제나 이룰꼬

  

마지막 종장, 끝귀절을   '...언제쯤이나 가능할지'로 썼다가  좀 약한 것같아  '그 언제나 이룰꼬'하고 좀더 한탄조로 바꾸었다.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수동적 자세에 소통을 위한 능동적 액션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종장 끝귀절은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으로 당분간 화두로 삼아야 겠다.

이영도 시인은 '가'와  '는'이란 조사를 두고 14년간을 고심했다는 이야기를 백수 정완영 선생으로부터  직접 들었다.

퇴고는 끝이 없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것만큼 고친다.

출판된 책을 받고도, 출판 기념회 테이블에 앉아 책에 바로 고치고 있을 때도 있다.

원고 마감 날짜는 있어도 완성된 작품은 없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퇴고를 하고 또 해도 미완의 사리로 남는 작품들.

도공의 마음으로야, 그대로 깨어버리고 싶은 작품인들 얼마나 많으랴.

하지만, 가마에서 굽혀져 나오는 도자기를 나오는 족족 깨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언제나 끌어 안고 읽어 보고 또 읽어 보며 가지고 논다.

정상에 올라 서둘러 하산하기보다, 팔다리가 긁히고 미끄러져도 등정 그 자체를 즐기며 올라가 보는 거다.

공부삼아 써 보는 이름 시조 하나 쓰려해도,  이런 일련의 지적 정서적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고뇌 속에 쓰는 즐거움도 변행되기 때문이다.

모리스.

요상한 이름에 엉뚱한 주문이로다.

아쉬운대로 숙제를 끝냈으니 카톡으로 보내주고 잠을 청해야겠다.

이 글을 쓰다 보니, 어느 새  밤 두 시가 넘었다.

혹,  다음에는 '모르쇠'로 지어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