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있다

 

 

  저녁을 먹으며 남편과 딸에게 수영장에 다녀온 이야기를 물었다. 딸은 막 생각났다는 듯 케이도 왔다고 했다. 식탁 위 화제는 자연스레 케이로 향했다. 

  우리 골목의 아이들은 종종 집 앞에 모여 논다. 이 그룹에 케이가 합류한 것은 일 년 전이다. 아빠와 함께였다. 그 후로도 케이는 늘 아빠와 와서 놀다 갔다. 남편이 그 아빠는 아이와 참 재밌게 노는 것 같다고 이야기를 받았다. 항상 둘이라면서. 생각해 보니, 월마트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도 부녀 둘뿐이었다. 케이 엄마를 본 적이 없기에 이참에 인사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없었다. 이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딸이 케이 엄마는 산타아나에 산다고 말한다. 남편도 나도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 도시는 우리 동네에서 삼십 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이다.

  “가까워서 좋다! 엄마 자주 볼 수 있잖아!” 

  나는 한껏 과장된 톤으로 말하면서 동시에 눈으로는 대화 주제를 바꾸자고 남편에게 눈짓했다. 딸 앞에서 섣불리 그들의 사연을 짐작하고 싶지 않았다. 부모의 분리가 아이를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그 현장을 눈앞에서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결혼을 앞두고 있던 나는 집 근처에 있는 보습학원에서 초등학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다. 시간이 흐른 만큼 얼굴도 이름도 흐릿하지만 한 아이만큼은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한다. 

  서군은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조부모 밑에서 네 살 터울 형과 산다는 것을 전임자로 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저소득층 자녀를 위한 교육비를 지원받기 때문에 따로 학원비를 내지 않지만, 혹시 그것이 다른 아이들에게 노출될 경우 아이가 상처받을 수 있으니, 형식적으로 학원비 봉투를 전달하라는 당부도 받았다. 내가 서군에 대해 아는 것은 그 정도였다.   

  봄이 온 것 같은 날씨였다. 겨우내 한 번도 세탁한 것 같지 않은 냄새가 서군의 초록색 재킷에서 심하게 났다. 할머니께 전화해서 옷을 빨 때가 된 것 같다고 말씀을 드려야 하는지 수업 들어갈 때마다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미혼이었던 나는 보호자에게 알려주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재 엄마가 된 나는 다른 방법도 있다는 것을 안다. 선생과 학생이라는 사회적 관계를 떼어낸다면 해줄 수 있는 것이 분명 더 있었다. 이십 년이 되어가지만, 여전히 그 순간을 후회한다. 미혼에 아이도 없었으니 다른 방법은 생각하기 어려웠을 거라고, 서군과 같은 교실에 있는 나를 애써 변명한다.  

  아이들이 일찍 학원에 온 날로 기억한다. 수업을 기다리고 있던 나는 아이들의 소리를 따라 교실로 들어섰다. 그 순간 한 아이가 대뜸 나를 향해 “선생님, 얘는 엄마 없어요!”라고 서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의기양양 외쳤다. 강자의 몸짓과 목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약자의 표정이 내 눈에 들어왔다. 

  “엄마 없는 사람이 어딨어? 그러면 OO는 아빠가 낳았나?” 

  아이들이 박장대소했다. 아이들의 웃음이 가라앉고 나는 진짜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우리는 다 엄마가 낳았지. 그래서 이 세상에 엄마 없는 사람은 없어. 사정이 있어서 함께 살지 못하는 거지. 그래도 가끔 만나잖아. 전화도 하고. 그렇지, OO야? 밝아진 표정으로 서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엄마가 제주도에서 누나들과 살고 있다고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덧붙인다. 나는 아이의 기를 더 살려주고 싶었다. 와! 제주도? 그러면 OO는 제주도도 많이 갈 수 있어! 태세전환(態勢轉換). 아이들이 서군을 부러워한다.   

  나는 그날 아이가 보인 두 표정을 모두 기억한다. 미혼이고, 아이가 없는 나에게도 첫 번째 표정은 아팠다. 드러내기 싫은 치부를 새로 온 선생님도 결국 알아버렸다는 당혹감이 빠르게 스친 후, 아이는 체념하듯 고개를 숙였다. 이런 상황을 얼마나 겪었던 것일까. 너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현재 서군이 몇 살쯤 되었을지 손으로 꼽아본다. 이십대 중반이다. 어떻게 자랐을까? 내가 한 말을 기둥 삼아 씩씩하게 청소년기를 보냈기를 바란다. 우리는 모두 엄마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