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색과 연두색 국화를 비석 앞 꽃병에 정성스레 꽂았다. 봄바람에 실린 국화 향기가 달콤하다. 오늘은 우리 부부의 결혼 37년이 되는 날이다. 결혼기념일을 그와 자축하려고 남편의 산소를 찾았다. 술을 좋아했기에 올 때마다 한 잔씩 부어 주었는데 오늘은 술대신 두 손자 사진을 멋진 액자에 끼워서 가져왔다. 당신 없는 빈자리를 이 아이들이 채워주어서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비석에 새겨진 그의 이름을 손으로 더듬는다. 햇볕에 익어서 따스하게 달아오른 비석을 통해 그의 온기가 느껴지며 나를 반기는 듯 했다. 우리의 그날을, 물기를 머금어 축축한 잔디에 앉아 지나온 날을 되새겨 본다.
서로의 눈빛에서 마음이 움직여 미래를 약속하며 많은 하객들 앞에서 결혼을 서약했다. 한 손에는 프리지어 향기를 품고 설레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손을 잡고 식장을 걸어 들어갔다. 아버지는 나를 포근히 감싸 안아주시고는 등을 밀어 사위에게 넘겨주셨다.
33년 사는 동안 힘든 일, 억울한 일, 포기하고 싶었을 때도 많았다. 시간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면서 잊고 살았을 뿐이다. 남편은 마치 떠날 것을 알고 있었듯이 떠나기 몇 달 전부터 신혼 때처럼 다정하게 손을 잡고 다니자고 했고, 커플링도 맞추자고 했다. 다 늦게 웬 커플링, 코웃음이 나왔다. 어색하지만 예쁜 반지를 늙어가면서 똑같이 나누어 끼는 것도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우린 곧바로 그의 후배가 하는 금방을 찾아가서 서로 똑같은 화이트골드 실반지를 맞추었다. 일주일 후에 찾으러 가기로 했다. 남편은 반지를 찾기 하루 전날 동창회에 다녀오다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 사람을 떠나보내고 마치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으로 살았다. 곁에 있을 때는 사랑한다는 말이 왜 그렇게도 하기 어려웠는지. 이별을 예감했다면 하루에도 수 십 번은 했을 것이다.
함께하는 동안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한 후회가 밀려온다. 어떤 사람은 오랜 시간 동안 고통 속에서 고생하다 떠난다고 하던데 그나마 아무 고통 없이 갔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 말하고 싶다. 죽음 앞에서도 고생 안 하고 떠난 것에 감사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그만큼 그를 사랑했기 때문일까. 죽음 앞에선 순서가 없는 것 같다. 남편과의 영원한 이별, 누구나 한 번쯤은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생각으로 인생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드려야 할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외로운 상실감도 차츰 가라앉았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끔 그 사람을 잊고 살 때도 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찾아오는 망각이다. 자꾸 잊혀져가는 그와의 추억이 슬프다. 언제부터인지 꿈에서도 만날 수 가 없다. 이제 남은 인생을 새롭게 엮어 줄 또 다른 꿈을 꾸고 싶다. 좋아하는 일도 하고 여행도 다니고 새로운 나의 추억을 쌓으면서 살아야지.
남편의 맑고 환한 미소를 떠올리며 함께 했던 추억을 국화 향기에 실어 보낸다.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열어보는 파란 상자 속의 커플링. 오늘 같은 날 그가 남긴 커플링을 끼고 올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