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처럼
먼 산이 하얗다. 올겨울엔 비가 많이 온 탓에 반가운 선물을 받은 듯하다. 로스앤젤레스는 일 년 내내 따뜻하지만, 비가 오면 인근의 높은 산이 눈으로 덮이는 장관이 연출된다. 우리는 그 하얀빛에 매료되어 눈을 찾아 떠난다. 연말 휴가를 보내기 위해 요세미티 계곡을 향해 운전한다. 피부에 닿는 차가운 바람에 닫혀 있던 가슴이 상쾌하게 열린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누군가의 잘못을 용서로 화해하며 마무리하고, 새 계획을 백지 위에 그리는 정결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고 싶다.
곧은 고속도로를 지나 좁은 길로 들어선다. 인생 여정이 곧은길만 펼쳐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산속에 또한 좁은 길이 있다. 설레는 마음도 잠시뿐 꼬불꼬불 돌아가는 산길 때문에 어지럽고 멀미가 나려고 한다. ‘일 년이 이렇게 힘든 여정이었나.’ 지나간 일 년을 회상한다.
이민 생활에 적응하고 정착하려고 안간힘을 쓰던 시간이 있었다. 앞만 보고 달렸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마치 산에 오르는 도전과 같았다. 낯선 세상에서 희망을 품고 꿈을 이루고자 했다. 때로는 숨이 차고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나에게 주어진 소명이라 여기며 하루하루 강하게 견디었다. 약한 부분이 강함이 되어 최선을 다하려 했다. 그런 과정의 고비를 지나며 무리하게 파생된 부작용은 없었는가를 되짚어본다. 그때그때의 사정이나 형편에 따라 그 순간을 모면하거나 회피하기 위해 놓치거나 적당히 처리한 것은 없었을까? 마치 멀미를 막기 위해 약만 먹으려고 하는 것처럼. 성취된 결과만을 보려 했던 뒷모습이 어떻게 남겨져 있는지 돌아본다.
잊지 못할 산이 떠오른다. 몇 년 전 뉴질랜드 남섬을 여행할 때다. 멀리 설산이 신비로운 빛으로 다가왔다. 고고하게 흰 자태를 드러내는 마운틴 쿡(Mountain Cook, 아오라키)은 3,724m 높이로 빼어난 비경을 자아냈다. '아오라키'는 '구름을 뚫은 산'이란 뜻이다. 빙하로 덮인 산봉우리 중 최고봉이 마운틴 쿡으로 하늘을 찌를 듯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반사하는 햇빛에 어우러져 황홀함을 더했다. 바로 뉴질랜드 최고의 등반가 에드먼드 힐러리 (Edmund Hillary) 경이 에베레스트산을 정복하기 전에 등반 훈련을 했던 산이었다.
힐러리경은 1953년 33세의 나이에 에베레스트산을 최초로 등정한 인물이었다. 그는 어릴 적에 몸이 왜소하고 소심한 성격으로 자신감을 얻기 위해 등반을 시작했다고 했다. 뉴질랜드의 5달러 지폐에 아오라키 산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모습이 담길 정도로 존경을 받았다. 마운틴 쿡은 모든 등산가에게 도전을 위한 발판이 되었던 산이었기에 나는 그때 소중한 의미를 부여해 보았다. ‘구름을 뚫은 산’의 기상을 나도 품고 싶었다.
마운틴 쿡과 강물의 동행은 그림 같은 풍광을 빚어냈다. 눈 덮인 산들이 병풍을 두른 산꼭대기에 햇볕이 쏟아졌다. 빙하가 녹아내린 옥색 물은 광물 가루의 산란 효과에 의한 것이었다. 그 오묘한 색채는 에메랄드빛 물감을 화폭에 칠한 듯 고왔다. 강물 따라 내 마음도 여유롭게 흘러가다가 그 속에서 번뜩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연어가 뛰어노는 것이 아닌가. 어린 연어는 차가운 강에서 자라다가 바다로 나가 성어로 자란 후 산란을 위해 자기가 태어난 강으로 회귀한다고 했다. 강물은 흘러가 모든 것을 소멸하는 듯하지만, 생명을 잉태하는 샘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요세미티 계곡을 들어가며 나는 생각한다. 지난날 이민자였던 내가 새 터전에 정착하기 위한 열정으로 오르고 올랐던 숱한 도전을. Day Care Center 설립을 위해 시청과 소방서의 허가를 받고, 주 정부의 인가 획득을 위하는 과정을 거쳐 산 정상에서 '어린이 학교' 설립이라는 목표를 성취했다. 내 인생의 산꼭대기에 쏟아진 햇살은 주변 사람의 협력과 전능자의 은혜였다. 그 녹아내린 강물 속에서 많은 아이가 입학하여 성장하고 졸업한 후 커뮤니티와 세계를 향해 흘러갔다. 이제 그들이 이민 2, 3세로서 글로벌 시대의 주역이 되어 일하고 있음을 본다.
새해를 맞이하며 나도 강물처럼 흘러가자고 마음을 다짐해본다. 삶에 대한 욕구를 강물에 흘려보내며 조인 고삐를 늦추어 보자. 좁고 굽은 길에서 브레이크를 살짝 밟으며 속도를 늦추기도 할 것이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속도가 아닌 올바른 방향을 바라보고자 한다.
이제 일을 내려놓아야 할 은퇴 시기다. 내 의지를 내려놓고 거대한 흐름에 맡겨본다. 새 생명을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