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내비게이션
이희숙
커다란 가방을 밀며 로스앤젤레스 공항에 들어오던 때가 생각난다. 어린 두 딸의 손을 잡고 낯선 땅에 발을 디딘 지도 벌써 삼십여 년이 지났다. 그때는 American Dream을 이루기 위한 뚜렷한 계획도 미처 세우지 못한 채였다.
한국전쟁 당시 시부모님은 며칠 후에 다시 돌아오리라 생각하고 휴전선 이남으로 남하했지만, 끝내 고향을 다시 찾지 못하셨다. 북녘의 가족을 마음에 품은 채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지낸 날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을까. 기쁜 날에도 부모님을 생각하며 흘리시던 눈물은 가족에 대한 잔잔한 그리움이 되어 우리 마음을 적셨다. 전쟁의 아픔이 가시며 한국은 경제 성장을 했고 국제화 시대가 도래했다. 큰아들이 태평양을 건너 미국 땅에 뿌리를 내렸기에 부모님도 은퇴 후 고국을 떠나셨다. 둘째 아들인 우리 네 식구도 생활 터전을 옮겼다. 가족이 헤어져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함께 살기 위해서였다. 새끼 새들이 엄마 새가 있는 둥지 안에 모이듯 우리는 그렇게 미국 땅에서 모였다.
문화가 다른 타국이기에 새로운 출발을 위한 용기 있는 도전이 필요했다. 이민 생활에 적응하며 배워야 할 사항 중에서 첫 번째가 지도를 읽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었다. 종이 책자로 된 지도를 뒤적이며 모르는 곳을 찾아가는 시도는 나에게 신선한 의욕을 주었다. 주소로 정확한 위치를 찾은 후 페이지 쪽수와 디렉션을 메모해 출발하곤 했다. 지금도 종이 지도책은 교과서인 양 내 책꽂이에 꽂혀 있다. 미래를 향해 나가야 할 길을 안내해주었기에 소중한 길잡이로 간직하고 싶어서이다.
얼마 되지 않아 두꺼운 지도책 대신 인터넷 Google map을 통해 편리하게 가는 방법이 생겼고 차에 Navigation이 부착되었다. 내비게이션은 출발 지점에서부터 도착지까지의 거리, 소요 시간, 가는 방법과 길 이름을 자세히 설명해 준다. 위성이나 자자기 센서로 배, 비행기, 자동차의 주행을 지시하며 운전을 도와주는 장치와 프로그램이다. 게다가 교통 체증으로 길이 막히면 다른 지름길로 안내해준다. 길가에 떨어진 장애물이나 교통경찰의 단속 위치까지 감지해 미리 알려주니 얼마나 편리한 장치인가.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잘 따라가면 쉽게 목적지를 갈 수 있으니 말이다.
얼마 전 한국에서 손님이 와서 만나러 갔다. 위치를 어렴풋이 아는 곳이기에 망설이지 않고 출발했다. 사전 공부나 내비게이션을 켜지 않은 채 한참을 가다 보니 예상치 않던 산길을 만났다. 목적지에 다 도달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하던 건물이 없었다. 약속 시각이 다가오니 마음이 더 급해졌다. 그때 번뜻 떠오른 게 있었다. '아~' 마음을 가라앉히고 기계를 켰다. 현재 내가 서 있는 위치로부터 안내해주므로 뿌연 안개가 걷히는 것과 같이 목적지가 선명하게 보이니 반가웠다.
반면 기계에 의지하다 보니 바람직하지 않은 문제가 생긴다. 동서남북 위치 감각이 없어지는 방향치와 길치가 되는 것이 사실이다. 안내자의 음성을 들으며 목적지에 가까이 왔는데도 주변을 빙글빙글 돌 때가 있다. 내가 가고자 하는 목표에 대한 자율성이 없이 수동적으로 되는 셈이다. 내 삶을 운전하는 주체가 방향도 모르는 채 길을 떠나는 것과 같으니 생각할 여지를 많이 준다.
멕시코의 외떨어진 선교지를 찾아가던 때였다. 처음 가는 낯선 곳이므로 차에 부착된 길안내기에 의존해 프리웨이를 달렸다. 예정된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그런데 미국의 국경선을 넘자마자 인터넷이 작동하지 않고 멈추는 것이 아닌가. 망망한 사막 길에서 안내자가 없어진 셈이니 당황스러웠다. 미처 생각지 못한 사고였다. 내가 살아가는 인생길도 마찬가지로 예상치 못한 실수와 실패로 인해 좌절하곤 한다.
오늘도 처음이자 한 번뿐인 길을 간다. 올바르고 정확한 길을 찾기 위해 고민한다. 차를 운전하며 내비게이션이 지시하는 대로 길을 가듯이 내 삶을 움직이는 내비게이션은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목적지와 방향을 제시하는 신뢰할 수 있는 길잡이가 답일 것이다. 인생의 여정에서 내가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를 점검하고 그 목적을 발견하여 열정적으로 그것을 추구하여 성숙에까지 이르는. 목적이 이끄는 삶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계획되어 섬기고, 사명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목적이 내비게이션이 되어 나의 삶을 이끌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