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치아리랑
신순희
1 빅토르 안
소치 동계올림픽이 끝났다. 지난 2월 7일부터 23일까지, 러시아의 작은 도시인 소치에서 개최된 이번 동계올림픽에서 최후의 승리는 주최국인 러시아다. 금메달 13개 은메달 11개 동메달 9개, 총 33개로 종합순위 1위를 차지했다. 그 중 4개의 메달은 한국에서 러시아로 귀화한 쇼트 트랙 스케이트 선수 안현수가 따냈다.
빅토르 안이라고 했다. 안현수의 러시아 이름이. 빅토르는 빅토리, 승리라는 뜻이고 빅토르 최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빅토르 최는 28세에 요절해 전설이 된 구 소련의 한인 3세 록뮤지션 이름이다.
또하나의 전설이 된 안현수가 러시아 대표로 소치올림픽에 출전한 장면을 동계올림픽을 독점중계한 NBC TV가 보도했다. 한국 대표로 2006년 금메달을 3개나 딴 선수가 2014년 러시아 국적으로 또다시 뛰고 있다고. 그가 금메달을 따는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보면서 나도 기뻤다. 한국인의 70%가 안현수 선수가 금메달 딴 걸 축하한다고 했다고 한다. 텔레비전에 비친 안현수는 금메달을 딴 후 대형 러시아 국기를 몸에 휘두르고 장내를 한바퀴 돌았다. 맘이 찡했다. 그동안 마음 고생 꽤나 했을 것이다. 잘했다. 워싱턴주 출신 스키 선수인 빅 와일드도 안현수처럼 이번 올림픽 스키 장거리 활강 경기에서 러시아 대표로 출전해 금메달을 땄다. 요즘같은 세상에, 내나라 네나라가 어디 있나. 세계는 하나다. 올림픽 정신도 그렇다.
한편 기분이 묘했다. 저 메달이 한국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아니다. 그냥 보고 있는데 마음이 이상했다. 한국인이 미국 국적을 따고 미국 시민권자가 된다 하더라도 외모는 감출 수 없다. 때때로 파란 눈의 미국인들은 나를 보고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나는 코리아라고 말할 수 있지만 미국에서 태어난 한인 2세는 어디서 왔다고 말해야 할까? 뿌리는 어쩔 수 없다.
2 김연아
한국은 금메달 3개 은메달 3개 동메달 2개, 총 8개로 종합순위 13위를 했다. 예상보다는 저조하다고 한국 언론들은 말하지만, 내 예상보다는 낫다. 참가 선수들은 최선을 다했다. 괜찮다. 모두 열심히 경기에 임했다. 그 중에서도 돋보이는 선수는 김연아였다. 김연아 선수는 피겨 스케이트에서 은메달을 따냈다. 그녀는 경기가 끝난 뒤 회심의 눈물을 흘리고 가뿐한 마음으로 은퇴 하길 원했지만, 금메달에 미련이 남은 한국인들은 판정에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뒷말이 무성했다. 17세의 러시아 선수 아델리나 소트니코바가 금메달 딴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두 선수 다 완벽하지는 않았다. 사람인데 완벽할 수는 없다. 둘 다 최선을 다했다. 나는 이번에 김연아가 동메달을 딴다고 해도 잘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더 잘했다. 관록있는 김연아 선수는 침착했다. 김연아는 “판정에 대해 돌이켜 생각해본 적이 없다. 결과가 어쨌든 경기가 잘 끝났다는 것에 대해 만족스럽다. 억울하거나 속상하지 않다. 좋은 기분을 유지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인의 넘치는 사랑이 불편하게 느껴졌을지 모른다.
마지막 갈라쇼에서 김연아는 존 레논 곡 ‘이메진’에 맞춰 스케이트를 타며 평화를 춤추었다. 얼음같이 푸르고 하얀 의상을 입고 하늘거리며 미끄러졌다. 발레리나같이 길고 가는 팔다리, 감성이 풍부한 눈빛, 연약한듯 강인한 동작이 은반의 여왕답다. 이제 김연아는 은퇴하고 쉬고 싶어한다. 또다시 김연아같은 선수가 한국에서 나올 수 있을까?
한국인들은 나비같은 의상을 입고 갈라쇼에 나온 소트니코바를 비판하기도 했다. “두 개의 커다란 노란 깃발은 왜 가지고 나왔나? 깃발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쩔쩔매는 모양을 보니 한심하다. 결국은 깃발을 놓고 말았다.” 나는 그 깃발은 시선을 끌기 위한 소도구였을 뿐, 본격적으로 연기할 때는 깃발을 바닥에 내려놓을 것이라 예상했고, 사실 그렇게 했다. 밉게 보면 한없이 밉다. 아직 17세 어린 선수에게 상처를 주지는 말아야겠다.
나는 소트니코바 보다는 15세 요정같은 율리아 리프니츠카야가 다음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는 이 소녀가 김연아의 강력한 라이벌이 될 것이라는 말이 돌았으나, 경험이 부족해서인지 경기에서 한 번씩 엉덩방아를 찧었다. 갈라쇼에서는 발랄한 빨간 의상을 입고 요정같이 날렵하게 실수하지 않고 정말 잘했다.
3 아리랑
러시아가 500억 달러를 넘게 경비를 들인 올림픽이라는 말이 실감난 폐막식이었다. 내가 본 올림픽 폐막식 중 최고다. 공중에서 공간에서 바닥에서 입체감있는 무대와 색채가 환상적이었다. 러시아가 자랑하는 모든 예술이 총동원되었다. 발레, 문학, 미술, 음악이 다 표현되었다. 은빛 반짝이는 옷을 입고 오륜기를 만드는 마스게임도 놀랍고, 화가 샤갈의 그림이 바닥에 화사하게 그려지는가 하면, 내가 아는 얼굴인 턱수염이 더부룩한 솔제니친을 비롯한 러시아 문호들의 초상화가 걸렸다. 러시아의 저력은 대단하다.
다음 개최지인 한국의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평창에서 온 한복입은 소년 소녀가 청아한 목소리로 애국가를 불렀다.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이종길 가야금 연주자가 가야금을 들고 나와 무대 바닥에 앉았다. 아리랑이 연주되었다. NBC TV 화면에는 조수미의 얼굴 한 컷만 비추고, 무대에는 푸른 학이 가득 날아다녔다. 꿈을 꾸듯 아득했다. 이승철의 모습이 언뜻 스쳐 지나갔지만, 재즈가수 노윤선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라 한국의 얼, 아리랑이 주인공이었다.
마지막 순서에 소치올림픽 마스코트인 산토끼와 눈표범과 북극곰이 등장했다. 거대한 동물인형들이 순진한 눈을 깜빡이며 사랑스런 눈길로 아이들을 내려다 보다, 북극곰이 ‘호’하고 입김을 불어 성화를 껐다. 북극곰 입에서 가늘고 뽀얀 김이 났다. 그리고 한 방울 푸른 눈물을 ‘툭’ 떨어트렸다. 17일 동안 소치를 밝혔던 성화가 꺼졌다.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악장이 힘차게 흘러 나오면서 대회는 끝났다. 화려한 불꽃놀이도 꺼져갔다. ‘평창에서 만납시다’ 이 한마디를 남기고.
[2014년 2월]
--미디어한국 2014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