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어느 날
신순희
일 년 중 가장 더운 8월의 어느 날, 나는 태어났다. 어머니는 자식 셋을 한여름에 낳았다. 오빠 생일을 차리고 보름이 지나면 내 생일 그리고 또 보름이 지나면 동생 생일이다. 여름에 생일을 맞이한 사람은 알겠지만 도통 먹을 음식이 없다. 날이 더우니 음식이 쉬 시어 버린다고 잘 차리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잡채도 생략하고 오로지 열 살까지는 해먹어야 한다고 어머니는 수수 경단을 빚었다. 수수가 잡귀를 쫓는다고 했다. 펄펄 끓는 물에 경단을 빚어 넣었다 떠오르면 건져내 팥고물을 묻혔다. 텁텁하고 목이 메는 그 맛이 싫었다. 귀한 줄 몰랐던 그 수수 경단, 지금은 없어서 못 먹는다. 나중에 먹어본 찰수수 부꾸미는 또 얼마나 맛있던지.
8월의 어느 날 태어난 나는 여름처럼 정열적이지도 활기차지도 않았다. 조용히 말 없는 아이였다. 너무나 조용해 존재감이 없는 아이, 내가 그랬다. 초등학교 6학년 때다. 수업 중에 뒤에 앉은 아이에게 물어볼 말이 있어 뒤돌아보았다. 마침 그때 교실이 시끄러워 떠드는 아이를 찾던 선생님은 나를 지목했다. 앞으로 불려 나간 내게 무슨 말 했느냐고 다그쳤다. 난 떠들지 않았다. 수업에 관해 친구에게 말을 시키려고 뒤돌아 보았을 뿐이다. 선생님에게 그 말 하기가 싫었다. 구차한 변명 같아서 입을 꼭 다물었다. 한참을 칠판 앞에 서 있었다. 내 대답을 기다리다 지친 선생님은 말했다.
“어디 두고 보자.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황 씨 고집이 센가 신 씨 고집이 센가.”
담임 선생님은 황 선생님이었다. 끝끝내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선생님이 우리 동네 사는 얼굴이 하얀 친구를 편애하는 것도 맘에 들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잘생긴 총각 선생님이 고집 센 어린 계집애를 두고 때릴 수도 없고 참으로 난감했겠다. 말은 없고 자존심은 강하고.
나는 속으로 정열적인 아이였을지 모른다. 화려하지도 외향적이지도 않았지만 생각만은 자유로웠다. 게다가 조금은 엉뚱했다. 그것도 옛말이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더구나 미국으로 이민 와 살면서 자존심은 다 버렸다. 내가 목에 핏대 세우며 잘났다고 할 데는 남편밖에 없다. 말 없던 내가 점점 수다쟁이가 되어간다. 자식에게도 말하기 조심스럽고, 밖에선 좁은 시애틀 바닥에 소문날까 두려워 말조심해야 하고. 자연히 모든 답답한 심정을 남편에게 고한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말 못하다 병나면 어쩌랴. 남편도 내 말 들어주느라 고생 좀 할 것이다.
8월이 오면 달력 중간쯤 어느 날에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쳐둔 때가 있었다. 엄마 생일이라고 써놓고 식구에게 알렸다. 그날이 내 생일이다. 생일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내 생일 내가 광고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일쑤였다. 언젠가 아무 말 안 하고 있으려니 그날이 다 지나가도록 누구 하나 꽃 한 송이 주지 않았다. 참다못해 저녁을 먹으며 오늘이 내 생일이야 하니, 무안해진 남편이 아이들을 데리고 그 저녁 시간에 선물을 사러 나갔다. 길들여야겠다는 생각이었지 꼭 무얼 바란 건 아니었다.
이제 엎드려 절받기라도 하려 한다. 한마디 덧붙여 늦게 주는 선물은 받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생일은 지나간 뒤에는 차리지 않는 거라며, 어머니에게 들은 말을 덧붙인다. 아들이 장가를 가면 어머니 생일만큼은 챙겨야 하지 않겠나. 말의 효력이 있어서 요즘은 나보다 먼저 내 생일을 식구들이 챙긴다.
8월에 태어나서인지, 나는 더위를 탄다. 해가 강한 여름 볕에 원래 까무잡잡한 피부가 더욱 까매진다. 대학 때 서해안, 충남 비인에 있는 학교 캠프장으로 학과 캠프를 간 적이 있다. 열흘간 바다에서 수영을 배우며 군 막사같이 툭 터진 숙소에서 단체로 잠을 잤다. 그때 ‘미스 비인’이라고 피부를 가장 검게 태운 여대생을 선발했다. 친구들이 밀어대는 바람에 얼떨결에 나는 그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뜨거운 해변에 가만히 누워 있기만 해도 새까맣게 탈 텐데 올리브유를 발라 피부를 태웠다. 지글지글, 얼마나 새까만지 나중에 서울로 돌아와 거리를 나다니니 사람들이 다 쳐다봤다. 눈만 반짝거렸으니 신기했나. 대회를 위해 친구들은 내 머리에 ‘후까시’를 넣고, 하얀 플라스틱 빨대를 세모꼴로 접어 한 꼭짓점에 칼집을 넣어 내 귓밥에 끼어 귀걸이를 해주었다. 그런 다음 수영복을 입고 엉덩이를 좀 더 씰룩거리며 걸으라고 걸음걸이 연습을 시켰다. 친구들 덕분에 2등을 했다. 지금 생각해도 나같이 나서기 싫어하는 애가 어떻게 수영복을 입고, 심사하던 교수님들 앞을 걸었는지 믿어지지 않는다. 아마도 무더위에 제정신이 아니었나 보다.
시애틀의 여름은 미지근하다고 생각했는데, 올해는 이상하다. 8월 기온이 연일 화씨 80도가 넘는다. 하긴 사람이 변하는데 지구라고 변하지 말라는 법이 있나. 그렇다 하더라도 시애틀의 여름을 한국에 비길 수는 없다. 그 옛날, 가난하던 한국의 8월 어느 날 내가 태어나던 그해, 어머니는 무더위에 얼마나 고생을 하셨을까. 언니가 말했다. 생일에는 어머니에게 큰절하는 거라고, “어머니 저를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하는 거라고. 그 말을 진작 들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지금 나는 시애틀에 있다. 어머니로부터 “생일 축하한다.”는 카드를 받기 전, 이번에는 내가 먼저 어머니에게 감사의 카드를 부쳐야겠다. 8월의 어느 날에.
[ 2014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