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과수제과에서 생긴 일
신순희
철없던 시절, 어떤 미팅에서 만났던 그 남학생은 더벅머리에 우직한 사투리를 썼다. 그는 상영 중인 영화 ‘러브 스토리’를 같이 보자고 했다. 감미로운 영화음악과 눈물을 자아내는 남녀 대학생의 사랑이 그려진 화제작이었다. 나는 이미 그 영화를 봤지만 하도 졸라대서 또다시 보았다. 그리고 그 남학생의 일방적인 약속에 바람을 맞쳤다. 자기 주장만 너무 내세우는 그가 편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친구와 무작정 돌아다니던 나는 종로 1가 ‘무과수제과’ 앞 길에서 우연히 그 남학생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반색을 하며 제과점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별일 없이 심심했던 친구와 나는 그렇게 했다. 여점원이 주문을 오자 그는 대충 알아서 빵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장삿속이라 그런지 빵이 한 접시 가득 나왔다. 무슨 말이 오고갔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반갑다 뭐 다시 만나면 좋겠다. 이러지 않았을까.
그다음이 문제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빵값을 지불하는데 그가 쭈뼛쭈뼛했다. 돈이 모자란 것이다. 황당한 순간이다. 계산을 기다리던 주인은, 꼭 순진한 남학생에게 여학생들이 바가지를 씌운다는 표정으로 나한테 돈을 내라고 다구쳤다. 무안한 표정으로 미적거리던 내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때 친구와 나, 둘 다 돈이 없어서 차 한잔 못 마시고 거리를 헤매는 중이었는데. 별 수 없이 그가 가지고 있던 두꺼운 책을 맡겼다. 그리고 우리는 어정쩡한 분위기 속에 헤어졌다. 차마 돌아서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다음날 학교 강의가 끝난 오후, 나는 그 빵집을 다시 찾았다. 돈을 갚기 위해서였지만 한 발 늦었다. 이미 그 남학생이 책을 찾아가 버렸다. 좀 더 일찍 올 걸 그랬다. 미안하다는 말을 결국 하지 못했다. 고의가 아니었다 절대로. 정말 나도 돈이 없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곳이 데이트 장소로 유명했다는 것을. 그 앞을 숱하게 지나다니기만 했지 들어가 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그 남학생의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 ‘무과수 제과’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미안한 내 마음만 남았다. ‘무과수’가 무슨 뜻일까. 누군가 말한대로 파인애플 통조림이라는 뜻일까. 알 수 없는 제과점 이름처럼 미완으로 끝난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씁쓸하다.
[2012년 2월]
글이 재미있습니다. 옛날 저도 미팅했던 생각이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