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문

 

신순희

 

수필 하나를 썼습니다. 딴엔 제법 그럴듯하여 흐뭇해집니다. 다음날 다시 읽었습니다. 오자도 나오고 문맥도 혼자만 이해할 같은 보입니다. 글을 읽는 이는 무슨 소리인지 모를 겁니다. 내용도 새로울 없고 깊이가 없습니다. 한숨이 나옵니다.

누군가의 수필을 읽었습니다. 유명한 수필가의 글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쓰는군요. 기가 죽습니다. 손에 힘이 빠집니다. 뭔가 쓴다고 수필가라고 자신이 부끄럽군요. 정확히 말하면 수필 쓰는 아무개라고 하긴 합니다만 그게 그거지요. 겁없이 이름을 걸고 글을 발표하다니요.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없이 들어서서 쓴다고 소문이 나고 말았네요. 실은 스스로 소문이지요.

수필을 책으로 엮어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힙니다. 글을 쓴지 얼마다 되었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네요. 수레는 덜컹거리든 말든, 머릿속으로 꼼꼼히 책을 만듭니다. 사이에 넣을 그림도 사진도 상상해 봅니다. 이내 기운이 빠집니다. 누가 책을 사보겠습니까. 그렇고 그런 글을 모았을 테니까요. 연예인도 아니고 유명 작가도 아니고 누가 저와 상관이 있다고 관심을 가질까요. 기껏해야 주변의 사람들이죠. 손가락으로 꼽을만한 숫자입니다. 기념으로 그동안 글을 모아 프린트해서 엮어 두고 혼자 보고 만족할까 생각도 해봅니다.

수필을 써놓고 컴퓨터 모니터에서 읽어보니 나름대로 쓸만합니다. 프린트해서 다시 읽어보면 아차, 싶지요. 책으로 활자화돼서 나온 다음에는 수정할 수도 없으니 난감하기만 합니다. 글이 너무 가벼운 아닌가, 누가 글에 고개를 끄떡이기나 할까, 앞부분만 조금 읽다 말면 어쩌나, 초조해집니다. 읽어야 책도 많고 글쓰기도 아득한 , 가끔은 실험적인 글이 쓰고 싶어지니, 무슨 조화입니까. 심성이 맑지 못하니 수채화 같은 수필을 쓰기는 틀렸습니다.

글을 쓴다는 사람들도 좋은 글은 알아봅니다. 평은 잘할 있지요. 저도 그러니까요. 심금을 울리는 하나만 있다면, 오래도록 두고두고 읽어도 좋은 글말입니다. 시처럼 두고 읽고 싶을 때면 다시 꺼내 읽을 있는 그런 수필을 하나만 있다면. 그런 수필을 날이 올까요? 오늘도 저는 지혜가 부족하여 펜이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희한한 것은 그런 알면서도 글을 쓴다고 컴퓨터 앞에 앉아 손가락 개로 자판을 두드립니다. 이것도 중독입니다.

있는 저는 글을 쓰고 발표하겠습니다. 발표된 순간 글의 미완성을 있지만, 그것이 채찍이죠. 이왕 들어선 , 이쪽저쪽 기웃거리지 않고 앞으로만 가겠습니다. 섣부른 기교는 부리지 않겠습니다. 때론 글을 희망으로 마무리해야 한다는 것이 저를 힘들게 하기도 합니다. 희망에는 날개가 있긴 합니다만 그래도 저는 걸어가겠습니다. 걸음씩 앞으로 걷다 보면 미리 날아온 희망이 어딘가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요?

 

[20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