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밖에 없는 사랑(입양 손자 윌리엄 2)

유숙자

윌리엄을 입양한 엊그제 같은데 벌써 3살이 되었다.

자라면서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귀골로 생겨 리틀 오바마라는 별명을 얻었다. 아이가 영리할 아니라 말도 잘하고 동작도 민첩하다.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서인지 씩씩하고 또래 아이들보다 키가 크다. 프리스쿨을 입학할 만큼 자랐다고 캔자스에 있는 윌리엄의 생부모에게 알려주었다. 작은아들 계획으로는 윌리엄이 틴에이져가 되면 친부모와 왕래까지도 고려 중이란다.

 

8 , 작은아들이 입양 이야기를 언뜻 비쳤다. , 잊고 지낼만하면 드리없이 불쑥불쑥 말을 꺼내더니 성탄절 가족 모임 아기를 데려올 있을 같다고 했다. 백인 아기는 입양아가 거의 없어 아무래도 아기를 많이 낳는 흑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갑자기 흑인이라는 말이 나오자 나도 모르게 , 흑인?” 하고 반문했다. 아들 내외는 인종에 대한 편견이 있느냐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쳐다본다. 편견까지는 아니더라도 동양인 아빠, 백인 엄마라면 한쪽이라도 피부색이 같기 바라며 말이었는데 선뜻 환영의 의사를 표하지 않자 이해할 없다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가난하고 기를 능력이 없어 불쌍하게 태어날 아이, 데리고 와서 키워주고 싶다는데 부모 표정이 저럴까. 아들 내외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어렸다. 침착한 아들 내외가 년을 두고 심사숙고하여 결정한 일인데 무슨 말을 것인가. 마음이 착잡했다.

 

집안일을 하다가도 이유 없이 우울해질 근원을 찾아가면 거기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입양문제다. 한국에 계신 시어른들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아직도 시댁에서는 제사 받듦이 조상에 대한 최고의 예의로 알고 계신 완고한 분들인데 핏줄이 다르고 피부색마저 다른 아이를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같지 않아 걱정이다.

 

아들 내외는 자신들이 입양하는 아기이니 모든 결정권이 본인들에게 있다고 생각하여 의논 없이 진행했다. 작은아들이 10 되던 영국으로 이주했고 미국에 와서도 부모 이외에는 한국 사람을 접할 기회와 환경을 갖지 못했다. 친족이 없어 서로 왕래하며 부딪치며 자연스럽게 익힐 있는 습관과 전통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방학 잠시 집에 오는 이외에 학교에서 생활하고 있으니 개인주의가 팽배해 있는 전형적인 미국 청년으로 성장했다. 학년 장학생으로 학업에 충실했고 지금은 샌타바바라 대학에 근무하고 있어 외관적으로 나무랄 없이 성장했기에 참견할 있는 부모 처지도 아니었다.

 

그즈음 미국 대기업의 부사장 부인인 조안 여사의 인터뷰를 보았다. 자신의 자녀가 있음에도 지체부자유 어린이 6명을 입양했는데 3명이 한국 아이라 한다. 남편이 회사 중역이어서 가정 경제를 감당할 있어 다행이라 했다. 8자녀를 보살핌이 쉽지 않은 일인데 그들 덕분에 기쁘고 보람있게 있어 행복하단다. 조안 여사의 인터뷰는 안에 일고 있던 갈등을 단번에 날려 보낼 있을 정도로 깊은 감동을 주었다. 생각이 너무 편협했던 같아 부끄러웠다.

 

작은아들이 입양을 생각한 것은 아내를 위한 남편의 마음이다. 며느리가 꽃가루 알레르기가 심하여 처방 약을 계속 복용해야 하기에 아기 가질 없다. 음식도 가리는 것이 많으니 영양 섭취가 골고루 되지 않아 몸이 약하다. 말을 하지 않아 그런 전후 사정을 알지 못했던 나는 결혼한 5년이 지나도 아기가 없자 넌지시 아들에게 물어보았다. 더구나 며느리가 아들보다 3 연상이고 초산이 늦어지면 힘들 같아 배려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속내를 떠봤다. 그때 아들은 분명한 어조로 그런 물음은 실례 하여 입을 다물게 했다. 부모가 자식의 2세를 기다리며 묻는 것이 실례라 하니 다시는 아기에 대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2005 3 22 캔자스 어느 가정에서 태어난 7번째 아기를 양자로 들였다. 아들이 산실에 들어가 탯줄을 자르고 아기를 품에 안았을 여린 심장의 박동이 가슴으로 전해져 눈물이 나더란다. 2 후에 아기의 사진을 보내왔다. 건강해 보이는 남자 아기, 흑인 특유의 넓적한 코가 잘생긴 귀여운 아기였다. 아들네가 양자를 들이는데 5년여 세월이 흐른 것은 까다로운 조건 때문이다. 반드시 양부모가 있어야 하고, 출산 아들이 탯줄을 끊기 원해 그런 조건이 쉽지 않았다. 동안 아기를 찾느라 경비도 만만치 않게 들었고 입양기관에서 애쓴 보람이 있어 마침내 아들네 조건에 맞는 아기를 찾아주었다. 결혼한 5년이 지나면서부터 양자를 생각하던 아들 내외는 세월을 기다리며 찾은 끝에 결혼 10주년 선물로 아기를 얻게 되었다.

William Tedros Yu. 손자 이름이다. 윌리엄의 법적 책임은 부모와 큰아들이 함께 져야 했다. 그럴 리야 없겠으나 만약에 작은아들 내외에게 사고가 생겨 양육할 없을 리걸 가디언(Legal Guardian) 되어 아기를 책임진다는 쉽지 않은 법적 사인을 했다.

 

잠시 하나님께서 맡기신 아기 사랑해 주고 보살펴 주고 정성을 다해 키워서 어엿한 사회인으로 내보내고 싶다는 아들 내외의 생각은 더없이 기특하지만 가족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에 어려운 점도 있었다. 결국, 아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는데도, 처음에 , 흑인?” 했던 마디로 아들 내외에게 섭섭함을 안겨주어 한동안 부모와 거리를 두었다. 그때 기쁘게 받아들여 격려해 주고 다독여 주지 못한 내가 편협했던 같아 두고두고 마음이 쓰인다.

혹자는 내가 흑인 손자 것을 대단하다고, 이해심 많다고 감탄한다. 어떻게 그런 결단을 내릴 있었느냐고. 그것은 전혀 속사정을 모르는 말이다. 우리 내외의 의견보다는 1차원적으로 부모가 아들 내외의 생각에 따라야 했기에 찬성하고 반대할 여지도 권한도 없었다. 영역 밖의 일이었다.

 

작은아들 내외가 사는 샌타바바라는 백인들의 도시다. 가운데서 아들네는 피부 색깔이 저마다 다른데도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고 이웃과 자별하게 지낸다. 미국 부모들은 아이에게 입양 사실을 숨기지 않기에 이웃과도 면이 자유롭다. 아이가 사물을 이해할 정도 나이가 되면 입양 사실을 말해준다. 입양 부모는 작은아들네처럼 아이가 없는 예도 있고 자신의 아이가 있어도 입양하는 사람도 있다. 세상에 태어난 아이들은 누구나 보호와 사랑받으며 자랄 권리가 있다는 박애 정신이 철저한 탓이리라.

 

지난해 언론사에서 아들네 가족을 취재하고 싶다는 의사를 비쳤다. 아들의 성격을 아는 나는 정중하게 거절의 뜻을 표했다. 오래전 작은아들이 며느리와 약혼을 하고 결혼 임박해서 데리고 왔을 한국 아이였으면 좋았을걸.’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들은 나는 여자와 결혼을 하는 것이지 인종을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했다. 아들이 흑인 아이를 입양했을 때도 아내를 맞을 때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후에 아들 내외에게 조심스럽게 언론사의 의사를 전해 주었다. 아들은 13 전의 말을 되풀이했다. ‘나는 단지 아기를 입양했을 인데 그것이 취재의 대상이 되는지 이해할 없다고. 아들의 정서가 이해되었다. 어릴 영국에서 살았고 11학년에 미국으로 왔다. 형과는 달리 한국말을 잘하지 못하는데다 아내마저 백인이어서 사고방식이 미국화되었다. 어느 때는 내가 생각해도 심하다 싶을 정도로 미국사람처럼 변한 아들이 낯설다.

 

윌리엄은 부모가 들인 정성만큼 자란다. 사물을 판단하고 감정을 조절할 있는 나이가 되었다. 주말이면 윌리엄과 바닷가에 나가 공놀이를 즐긴다는 아들의 말을 들으면서 단란한 가정의 한때를 그려 본다. 나는 사랑하는 손자 윌리엄과 함께 여행도 하고 싶고 가끔은 한인 타운에 데리고 가서 한국적인 , 우리 고유의 음식을 맛보여 주고 또래의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게 하고 싶건만 아들 내외가 원치 않기에 마음뿐이다. 주변 사람들이 윌리엄에게 상처가 되는 행동을 보일까 조심하는 부모 마음일 것이다.

 

윌리엄이 건강하고 바르게 자랄 있도록 기도 한다. 사랑스러운 손자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아들이 입양을 생각했을 때의 소망대로 가정의 꿈나무로 튼실하게 자라 사회의 개체로서 성숙한 삶을 있게 되기 바랄 뿐이다.

아름다운 고장 샌타바바라에서 평화롭게, 행복하게 보람을 느끼며 사는 아들 가정이 보기 좋다. 가정에 윌리엄이 있기에 그들은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사랑을 확인하며 살고 있다.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