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벼랑길을 돌아나올 때 맞은편에서 오던 노인에게
길을 비켜주었습니다 노인은 지나갈 생각은 않고 내게
문득 물었습니다 그대는 어디가 아픈가
나는 기침을 했습니다 열이 나서 몸을 떨었습니다
안 아픈 데 없이 온몸이 쑤셔왔습니다
노인의 소맷자락을 부여잡을 듯 대답했습니다 다 아픕니다
노인은 지나갈 생각은 않고 쳐다보지도 않고
위로도 하지 않고
뼈만 남은 손가락을 들어 내 가슴을 가리키며 다시 물었습니다
그대는 어디가 아픈가
그대는 어디가 아픈가
이제까지 따라다닙니다 내게 회초리가 되었습니다
한글날이 공휴일로 지정됐다. 이쯤이면 기억 속에 묻어뒀던 이름들이 등장한다. 한글을 몹시 사랑했던 우리 시인들 말이다. 1년 365일을 한글에 골몰하며 살았을 시인 김영랑, 백석, 윤동주…. 그 많은 날들 중 딱 하루만 이들을 칭찬해 주는 것은 어째 좀 야박하기도 하다.
그런데 시인들만 한글을 사랑했을까. 그럴 리 없다. 내게는 한글날이 되면 떠오르는 이가 한 명 더 있다. 내가 알기로 한글로 된 문학 텍스트를 가장 많이 읽어낸 사람. 남들이 알기로도 우리 문학 텍스트에 대해 가장 많이 비평했던 사람. 바로 비평가이자 학자 김윤식 선생이다.
그는 정말이지 한국 문학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엄청났다. 텍스트, 소설가, 시인, 제자에게 모두 엄격하고 어딘가 모르게 자상했다. 냉정하게 아껴줬다고나 할까. 그러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듯한 날카로움이 있었다. 마치 박진숙 시인의 시에 나오는 저 노인처럼.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회초리가 바로 그의 눈빛과 글에 들어 있었다.
한글날은 10월에 있다. 그리고 한글을 사랑했고, 한글로 된 문학은 더욱 사랑했으며, 한글로 숱한 글을 써내려갔던 김윤식 선생의 기일도 10월에 있다. 어쩐지 느낌이 팍 온다. 이번 달은 내내 한글날인 듯 선생을 떠올릴 것만 같다.
나민애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