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하다 / 이춘희
퍼붓는 햇볕에 대지가 헐떡인다. 밀려오는 열기에도 나무는 푸르름을 발산하고 풀은 싱그러움을 뽐낸다. 가지마다 빼곡하게 달린 잎이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풀잎은 바람의 리듬을 타며 팔랑거린다.
황톳빛이 듬성듬성 보이던 풀밭이 어느새 빈틈없는 초록빛으로 반짝인다. 질경이는 하늘로 꽃대를 질기게 세우고, 토끼풀은 이파리를 넓게 펼치며 땅따먹기 놀이에 한창이다. 메꽃은 어우러져 살자고 수평과 수직을 덩굴손으로 동여맨다,
초록마을 초입부터 연분홍 패랭이가 눈길을 잡아챈다. 그 솜씨를 보니 자석이 쇠붙이 당기듯 벌과 나비도 끌어들이겠다. 꽃잎은 가장자리가 새 깃털처럼 갈라져 있어 실바람에도 파르르 떨며 곤충을 부른다. 가루받이가 가장 잘 되는 자리를 적갈색으로 물들여 놓고 매개자에게 어서 앉으라고 손짓을 보낸다.
패랭이꽃과 눈 맞추다 고개를 드니 멀쑥한 참나리가 주황빛으로 빤히 쳐다본다. 비나 이슬에 꽃가루가 씻겨 내려갈까, 암술이 부러지지 않을까. 고개 숙여 땅만 본다. 곤충이 꿀을 찾아 꽃 안으로 들어갈 때 오래 비비적거려 꽃가루를 많이 묻혀가기 바라는 마음이다. 그 모습은 씨앗을 맺겠다는 간절한 의지다.
염원은 깨알 같은 점 속에 오롯이 담겼다. 곤충이 잘 볼 수 있게 점이 박힌 꽃잎을 아가씨 속눈썹처럼 말아 올렸다. 검보랏빛 점에서 나온 끈적끈적한 물질이 곤충의 발바닥을 묶고, 풍기는 향기가 곤충의 날갯짓을 멈추게 한다. 그러고는 꽃가루가 매개자에게 묻기 쉽도록 수술을 점 근처까지 불러내었다.
참나리꽃에 묶였던 눈을 겨우 풀고 돌아선다. 풀을 가르마 탄 오솔길을 걷는다. 들을 휘 둘러보는데 멀리서 보랏빛 털 방울 엉겅퀴가 까칠하게 노려본다. 바위 아래 호젓이 숨어 있어도 우아한 자태는 드러나는가 보다. 다가가 보니 통 모양의 작은 꽃들이 모여 탐스럽다. 겹꽃에서 벌과 나비는 한 번에 꿀을 풍성하게 얻고, 꽃은 꽃가루를 많이 퍼트린다. 상생(相生(의 조화(造化)도 꽃과 더불어 피었다.
숲에 들어서니 뜨거운 볕에 달떴던 얼굴이 이내 가라앉는다. 나무가 내뱉은 공기는 다소 축축하나 맑다. 측백나무 그늘 속에 핀 산수국꽃이 새뜻하다. 가장자리에 핀 헛꽃은 암술과 수술이 없고, 가운데 꽃숭어리를 이룬 참꽃은 작은 데다 볼품도 없다. 헛꽃은 화려한 색으로 곤충을 유혹하여 참꽃의 수정을 돕는다. 암술과 꽃가루가 만나면 헛꽃은 꽃잎을 뒤집어 자신의 아름다움을 숨긴다.
곤충을 불러들이려는 꽃의 각별한 노력이 경이롭다. 투명한 햇빛을 받아 다채로운 색을 빚어내는 능력. 곤충이 앉을 자리를 다른 색으로 표시하고, 끈끈한 액을 발라 오래 잡아두고, 작은 꽃을 여러 개 모아 수정을 많이 하도록 하는 아이디어가 뇌도 없는 꽃 어디에서 나왔을까. 또, 헛꽃의 희생정신은 어떻게 배웠을까. 방법은 다양해도 저들이 바라는 것은 하나, '여름'이다.
산수국 꽃숭어리 위로 벌 한 마리가 내려앉는다. 발이 닿자마자 꽃 위를 부산하게 움직인다. 몸을 덮은 털 여기저기에 꽃가루가 달라붙는다. 긴 혀를 꽃 깊숙이 찔러 넣는다. 꿀을 빠는 모양이다. 꽃은 곤충에게 꽃가루를 많이 붙이려고 끊임없이 변화했다. 꿀샘을 점점 더 깊이 옮겼다. 그때마다 벌과 나비는 대롱을 길게 늘이며 함께 진화했다. 곤충도 꽃가루와 꿀을 얻어 '여름'을 이루기 위해서다.
여름에는 여기저기서 씨를 만들고 열매 맺는 소리가 요란하다. 용비어천가에 '곶 됴코 여름하나니'는 '꽃이 좋고 열매가 많으니'라는 뜻이다. 옛말 '여름'에는 열음, 곧 열매의 뜻이 들어있다. 따가운 햇빛과 작달비를 열매 익히는데 이용하는 꽃과 곤충들. 수십억 년 전, 출현한 하나의 생명이 지구를 생물로 가득 채운 것도 열매 맺음의 열망에서 비롯되었지 싶다.
나 또한 삶의 열매를 맺으려 하루도 빠짐없이 부산하게 걸었다. 상생(相生)의 상대를 불러들이기 위해 화장을 하고 얼굴에 미소를 담았다. 우아한 척 책을 옆구리에 끼고 사뿐사뿐 걸었다. 아이들이 가는 길에 걸리적거릴까 봐 내 꿈 보따리는 주방 구석에 밀쳐두었다. 마음의 공간에 사랑, 행복, 성취의 열매 맺으려고 온갖 것들을 끌어들였다.
저들이 맺은 열매와 씨가 내 삶을 지켜왔다. 결결이 열린 나의 열매는 다른 삶에 생기를 불어넣었을까. 허기진 가슴을 채워주기도 했을까. 풍요로운 세상을 위한 보탬이 되었을까. 겉은 튼실한데 벌레가 든 건 아닌지, 속이 텅 빈 쭉정이는 아닌지, 한쪽이 썩은 열매는 아닌지 꽃을 통해 내 삶의 결실을 돌아본다.
여름 한가운데 서서 '여름'을 보았다. 이 계절이 식으면 다가올 가을날의 풍요를 맞이하리라. 여름을 '여름' 한 땀의 결실이 알밤처럼 토실하고 홍시처럼 발갛다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