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의 눈물 / 변종호

 

전생의 업이 많았나 보다. 애당초 편안한 팔자가 아니었다. 척박한 환경에서 평생 살아가야 하는 눈물겨운 생이다. 가엽게 여긴 하늘의 보은과 동강의 눈물로 평생 연명한다니 안쓰럽기만 하다. 운명을 탓할 수도 있으련만, 꾹 다문 입은 깨달음을 구하려는 수행자의 모습이다.

첫 만남의 상상으로 방망이질하는 가슴이 놀랍다. 밤잠을 설쳤다. 군복을 입고 첫 휴가를 떠나는 전날 밤 같았다. 감성 충만했던 시절이야 이해한다지만 일흔을 넘어선 나이에 남이 알면 흉잡힐 일 아닌가. 충혈된 눈으로 서두르는 가장을 보고 걱정하는 아내다. 뜻을 세우면 말려도 소용없기에 조심하라는 말만 뒤통수에 거푸 새긴다.

천등산 휴게소를 지나자 희끗희끗하게 눈이 보인다. 걱정하지 말라고 흰소리는 쳤지만, 눈길은 위험천만이다. 강원도로 접어들자 쌓인 눈이 점점 많아진다. 눈길도 염려스럽지만, 원하는 걸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났다.

겨울잠을 깬 이무기 같은 동강이 눈에 들어온다. 검룡소에서 힘차게 솟아오른 샘은 한강의 시원始原으로 수만 년 섭리를 거스르지 않고 낮은 곳으로 임한다. 거대한 산이 가로막으면 돌아가고, 여울을 달리느라 숨이 차면 소沼에서 쉬어가는 기지도 발휘한다. 강원도 태백 출생의 동강은 순수하고 여려서 흘리는 눈물이 잦다.

동족상잔의 포성과 함께 숨져간 군인들, 뗏목으로 한양을 다녀 오마든 가장이 귀가하지 못한 사연과 막장이 무너지며 생명을 잃은 수많은 광부의 영혼을 끌어안고 흐른다. 그런 동강이니 애타게 비를 기다리며 시나브로 생명줄이 꺼져가는 식생을 어찌 외면할 수 있겠는가.

한정된 동강의 석회암지대에서 목숨 부지하는 세계 유일의 동강할미꽃이다. 바위틈에서 자생하는 특성상 수분 저장고인 흑갈색 뿌리는 길고도 굵다. 잎이나 꽃은 철저한 뿌리의 통제로 줄기 없이 내보내며 잎자루는 길다. 3월 하순에서 4월 초에 꽃피우며, 추운 곳이라 꽃대는 흰털이 보송보송한 옷을 두르고 나온다.

서식지는 찌푸린 날씨에 눈발까지 날려 추웠다. 춘분을 지난 초봄이 아니라 한겨울이었다. 혹여, 성질 급한 녀석이 있을까 탐색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축제가 사흘 뒤라 찾았는데 바위틈을 비집고 나온 꼬물이 뿐이다. 뭐든 때를 잘 맞춰야 하는데 서두르다 또 허방다리를 짚은 셈이다. 귀하고 소중한 것은 쉽게 구할 수도, 볼 수도 없는 게 세상이치 아니던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땐 서두르지 말고 숨을 골라야 한다, 오랫동안 야생화를 탐사한 고수의 견해로 다른 곳을 둘러보기로 했다.

신기하게도 그곳은 화창한 봄날이었다. 꽃잎을 활짝 열어젖힌 동강할미꽃이 이방인을 반겼다. 오랜만에 고향 집에 들어서는 자식의 손을 잡고 눈물 글썽이던 주름진 내 어머니 같았다. 처음 접하는 동강할미꽃은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아름답다는 감정도 잠시, 혹독한 시련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이 생명체가 처연하게 느껴져 아릿해졌다.

돋을양지의 묘에서 경배하듯 고개 숙인 할미꽃과는 기품이 달랐다. 암팡지게 생긴 짧은 꽃대와 꽃에서 겸손을 갖춘 다소곳함은 어디서든 찾아볼 수 없었고, 고단한 삶에서 습득한 강인함을 느낄 수 있었다. 키는 작지만, 짙은 분홍과 연분홍으로 나뉘어 있는 꽃의 색감은 포근하면서도 선명했다.

카메라에 담으면서도 다른 아이들이 다칠세라 내딛는 한 발짝 걸음도 신경이 쓰였다. 예전보다 개체는 많이 줄었지만, 이만큼 보존된 것도 동네 주민 덕분이다. 찾아와 보고 즐기면 되는 것을 몰지각한 사람들이 밤중에 채취해 가는 바람에 밤잠 설치며 지켜낸 소중한 식생들이다.

인간은 소중한 것이 있으면 곁에 두고 싶은 물욕이 생긴다. 바닷가의 몽돌도, 야생에서 살아가는 식생도 있어야 할 자리가 따로 있다. 동강할미꽃을 검색하면 수많은 곳에서 판매한다는 광고가 뜬다. 안타깝다. 그렇게 구입한 꽃이 거친 자연환경에서 동강의 눈물로 피운 동강할미꽃과 어찌 비교할 수 있으랴. 무엇이든 제 자리에 있을 때 돋보이고 아름답지 않던가.

동강할미꽃은 1997년, 사진작가 김정명 씨가 발견하기 전부터 무쇠목숨으로 피고 이우는 토박이만 알던 두메 꽃이었다. 동강의 물안개라는 눈물로 생명을 이어가던 꽃이 생태조사로 동강할미꽃 명칭을 받게 되었다. 한 방울의 물도 아껴가며 살아내는 동강할미꽃은 수많은 시련을 견뎌낸 꽃이다. 꽃대의 길이도, 피어야 할 꽃과 이파리 개수조차 제어하는 생존 전략은 오랜 경륜을 지닌 지혜로운 뿌리의 추상같은 통제로 이뤄진다.

찾아가야 볼 수 있는 고고하고 청아하지만, 고단한 생의 내력을 알고 나면 속울음이 나는 동강할미꽃, 동강의 눈물로 천년만년 피고 졌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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