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아이들이 '사라진' 감사절 만찬

성민희 / 수필가성민희 / 수필가 

 
 

[LA중앙일보] 발행 2019/12/05 미주판 20면 기사입력 2019/12/04 18:11

 

 

오븐에서 연기가 솔솔 난다. 해마다 한 번씩만 맡는 냄새다. 터키 굽는 냄새가 이렇게 맛있을 수도 있구나. 처음 미국에 왔을 때는 암만 진하게 풍겨 와도 감각이 없더니 이제는 눈을 감고 그 속에 푹 잠기고 싶은 향기가 되었다.

딸이 정성껏 요리한 음식이 식탁 위에 차려졌다. 소금, 후추, 설탕, 버터를 넣어 잘 으깬 매시드 포테이토, 샛노랗고 부드러운 미국 고구마에 마시멜로를 넣어서 구운 야미, 크림콘, 그린빈, 그레이비, 스태핑, 크랜베리 소스, 샐러드, 디너롤 등이 알록달록 식탁을 채운다. 한 해를 감사하는 추수감사절 만찬 식탁이다.
딸은 모든 음식을 본인이 할 테니까 사촌들은 디저트와 음료수만 가져오라고 했다. 나는 김치와 잡채를 배당 받았다. 양식을 실컷 먹고도 뒤늦게 끓여낸 김치찌개와 밥을 반가워하던 어른을 위한 배려인 모양이다.
우리 집에서 할 때는 보이지 않던 와인바도 세련되게 차려졌다. 갖가지 종류의 치즈와 잘 쪄진 브로콜리와 당근, 블랙베리, 페퍼로니, 올리브와 땅콩 등 미국 사람들 파티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하기야 이 아이들도 모양만 한국 사람이지 세월 따라 미국 사람으로 변한 것을.
시간이 되자 식구들이 모여들었다. 어른들은 모두 빈손으로 오라고 했는데도 들고 온 과일 박스와 과자 상자가 한쪽 벽 밑에 쌓인다. 보스턴에서 날아온 조카는 공부하느라 힘이 들었는지 얼굴이 더 하얘졌고, 첫 직장을 잡은 막내 조카는 청바지를 벗어버리고 이제는 얌전한 치마 아래로 스타킹까지 신었다. 올 봄에 결혼한 조카는 아내의 어깨에 손을 얹은 모습이 의젓하다. 딸은 집을 휘젓고 뛰어 다니는 두 꼬마를 붙잡고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한다. 제법 엄마 티가 난다. 갈색으로 잘 익은 터키를 오븐에서 꺼낸 사위가 양손에 칼을 쥐고 나선다. 남편과 오빠와 남동생, 나와 올케들과 여동생이 하던 일이 모두 아이들 손으로 넘어갔다.
오늘은 어머니 대신 남편이 감사 기도를 한다. 구순을 넘긴 어머니는 당신도 힘들고 곁에 사람에게도 폐가 된다며 아예 오시지 않았다. 어른부터 아이들까지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부르며 모든 가정을 한 바퀴 돌던 느리고 평온하던 기도가 사라졌다. 아이들이 알아 듣든 말든 상관이 없던 경상도 사투리의 투박하던 기도는 짧고 간단한 영어 기도로 바뀌었다.
할머니의 긴 감사 기도를 견디지 못하고 킥킥 팔꿈치로 서로 찔러대던 아이, 높은 식탁에 팔이 닿지 않아 까치발을 하고 서서 애를 태우던 아이, 여드름이 퐁퐁 솟은 얼굴에 노랗게 물든 머리를 하고 나타나서 우리를 깜짝 놀래키던 아이가 모두 사라졌다. 보이 프렌드와 걸 프렌드를 수줍게 소개하던 아이도 이제는 아예 배우자를 따라 가버리거나 먼 나라에서 전화 목소리만 들려주는 어른으로 변했다. 커다란 냄비를 든 엄마 뒤를 쫄랑쫄랑 따라 들어오던 꼬마들이 어느새 자기 시간을 마음대로 요리하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 터키도 그대로고 와인도 그대로고 그때 켰던 촛불도 변치 않았는데, 아니, 우리도 그대로인데 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