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크리스마스 선물 '시바스 리걸'
성민희 / 수필가[LA중앙일보] 발행 2018/12/27 미주판 20면 기사입력 2018/12/26 18:43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남편의 회사를 찾아오는 할아버지가 계신다. 그는 두꺼운 은빛 반짝이 포장지로 곱게 싼 시바스 리걸 양주 한 병을 들고 온다. 선물을 받는 사람이 교회 장로라는 사실도 상관이 없다. 시바스 리걸을 선물한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즐겨 마신 최고의 술이라는 것이다. 사무실에 들어와서는 직원들 책상을 두루 다니면서 일 년 동안 돌봐줘서 고맙다고 극진히 인사를 하고 남편을 고급 일식집으로 데리고 간다. 시바스 리걸 병을 안고 집에 들어오는 날의 저녁 식탁 대화는 풍성하다. 할아버지는 연세에 비해서 참 젊게 살더라. 어쩌든지 음식은 가려서 먹어야한다더라. 운동을 열심히 하라고. 즐길 수 있을 때 많이 즐기라고, 주위 사람에게 베풀며 살라고. 부부를 소중히 여기라고 하더라. 해마다 똑같은 가르침을 복습한다. 일 년 내내 들여다보지 않던 차고의 장에 어느새 양주병이 꽤 모였구나 싶었던 3년 전, 퇴근한 남편의 얼굴이 예전 같지 않았다. 오늘은 몸이 불편하여 택시를 타고 오셨더라는 것이다. 봄에 할머니를 떠나보내고 혼자 지내는 하루가 너무 길고 지루하다고. 열심히 하던 운동도 이제는 체력이 따라가지 못한다고. 즐기던 생선회도 잘 잡숫지 못하신다고... 점심 식사는 기어이 남편이 대접했다고 했다. 또 한 해가 지났다. 할아버지는 사무실로 올라오시지는 못하고 시바스 리걸만 택시기사에게 들려서 보냈다. 놀란 남편이 내려가 보니 힘없이 앉아서 인사를 하시더란다. 낯 선 지팡이가 무릎에 기대고 있더란다. 그날은 식사도 못하고 가셨다. 작년에는 아예 택시기사와 시바스 리걸만 왔다. 고맙다고. 새해에도 여전히 복되게 살라고. 메모도 있었다. 집에 누워서 지낸다는 기별이었다. 올해는 소식이 없다. 갑자기 할아버지 생각이 난 남편이 이제는 내가 찾아뵈어야겠다고 했다. 해마다 연례행사 치르듯 그의 방문을 받고 식사를 하고, 그리고 또 일 년을 보냈다는 자각이 든다. 어떤 선물을 들고 찾아뵈어야 하나 고민이 생겼다. 그분이 뭘 좋아하시는지, 어떤 제품을 즐겨 사용하시는지, 그저 받기만 했지 회사 달력 외에는 드린 기억이 없다. 본인의 전화번호와 주소밖에 모른다. 몇 년째 먼지를 뒤집어쓰고 차고의 장에 재워져 있는 시바스 리걸. 그것들처럼 할아버지의 존재도 혹 그렇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주위사람에게 베풀며 살라는 그의 가르침을 들으면서도 '주위 사람'에 그를 포함시키지 않았으니 얼마나 무심했던가. 먼지 쌓인 것을 모두 끄집어 내어 닦는다. 소중히 품에 안고 오신 마음이 이제야 여명처럼 내 마음에 번져온다. 정성을 배반하는 것 같아 남에게 내어주지도 못해 쟁여져 있던 시바스 리걸.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주위를 둘러볼 줄 아는 그분의 마음이 따뜻하게 전해진다. 변함없이 쌓인 사랑의 실체를 보는 것 같다. 그 사랑이 떠나고 나니 그리움이라는 것이 찾아왔다. 다시는 듣지 못할 인생 선배로서의 진심 어린 충고와 격려,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몹시 생각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