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쪼이나쪼이나' 영옥이 언니

 

정초부터 여자 다섯이 모여서 펜 드로잉을 배웠다. 한국서 온 여고 선배 영옥이 언니가 선생님이 되어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몰고 갔다. 막내딸 산후 조리차 미국에 왔다는 소식에 냉큼 마련한 배움의 자리다.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쓱삭쓱삭 그려내는 펜 드로잉에 수채화 물감을 살짝 덧입힌 그림은 아련한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나를 매혹시켰다.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에 특유의 고음, 유난히 빛나는 눈빛.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면서 먼 옛날 여고시절을 생각한다. 그때도 언니는 넉넉한 품과 이상한 카리스마로 사람을 끌었다.

 

여고에 입학하자마자 교지와 신문편집부로 차출되어 언니들을 따라 다녔다. 3년을 입어야하는 교복이기에 한 치수나 큰 것을 어리버리 입고 다닌 1학년 여름방학이었다. 문예반 하기수련회에 무조건 가야한다는 언니의 말에 난생 처음 옷가방을 싸들고 따라 나섰다. 그때 처음으로 해운대를 지나면 송정이고 더 내려가면 월내라는 조그만 어촌이 있는 줄 알았다. 황토흙이 풀풀 날리는 골목길과 나즈막한 지붕의 바닷가 동네가 여름이면 찾아오는 피서객으로 잠을 깨었다. 우리는 기역자로 앉은 민박집을 통째로 빌렸다. 대청마루에 앉으면 얼기설기 엮은 싸리문 너머로 지나가는 행인을 볼 수 있었다. 오른쪽은 마루가 연결된 방이지만 왼쪽은 남의 집 벽이었다. 그 벽에는 창문이 열려있어서 누군가가 방안에서 움직이는 기척이 바로 느껴졌다. 인솔 선생님은 옆집에다 짐을 푸셨다. 지금 생각하니 창문 달린 방 옆이 아니었나 싶다.

 

도착하자 우리는 흥분했다. 마음대로 요리해도 되는 널널한 시간이 꿈만 같았다. 그것도 청춘이 펄떡이는 바닷가라니. 일찌감치 카레라이스를 만들어 먹고 모래사장을 맨발로 걷고 오니 해가 졌다. 해는 방금 졌어도 한여름이라 시간이 꽤 된 줄은 몰랐다. 우리는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바닷가의 추억을 시작으로 노래를 불러 제꼈다. 쨘짠쨘쨘 전주에 이어 나오는 달콤한 키보이스의 노래를 화음까지 넣어가며 신나게 불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레퍼토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영옥이 언니가 마루 끝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노래를 부를 테니까 너희들은 쪼이나쪼이나하면서 추렴을 넣어라. ?”

우리는 뜻도 알 수 없는 쪼이나쪼이나를 몇 번 연습으로 불렀다.

꽃 같은 처녀가 콩밭을 메는데. 쪼이나쪼이나/ 나비같은 총각이 대저 손목을 잡았네. 쪼이나쪼이나/ 나비같은 총각아 이 손목을 놓아라. 쪼이나쪼이나/ 호랑이 같은 우리오빠 대저 망보고 있노라. 쪼이나쪼이나.”

손뼉까지 치며 신이 났는데 갑자기 옆집 창이 왈카닥 열리며 남자 대학생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가시나들아, 돼지 멱따는 소리 그만해라. 잠 좀 자자.”

열 명이 넘는 처자들 목소리가 점점 그렇게 커진 줄 몰랐다. 우리는 얼굴을 가리며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데 영옥이 언니는 잽싸게 둘째손가락을 그에게 겨누었다.

나비같은 총각아, 그 창문을 닫아라.”

쪼이나쪼이나 합창은 자동으로 나왔다. 대청마루가 부서져라 발을 구르며 웃는데 싸리문 너머로 그 대학생이 나타났다. 그런데 모습이 가관이었다. 긴 런닝셔츠 아래로 짧은 바지는 보이지 않고 벌거벗은 두 다리만 보였다. 마치 아랫도리를 홀랑 벗은 코 찔찔이 꼬마아이가 서있는 형국이었다. 씩씩거리며 들어서는 그를 보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구, 팬티도 안 입고...” 하며 난리가 났다. 남자도 자기의 아랫도리를 내려다보더니 킥 웃으며 냅다 도망을 갔다. 그러자 또 다른 남자가 문 앞에 턱 버티고 서더니 눈을 크게 뜨고 노려보았다. 수영복 팬티만 입고 지나가는 자기를 보고 우리가 놀리는 줄 안 모양이었다. 그 소동에 놀란 인솔 선생님이 부시시한 얼굴로 슬리퍼를 끌고 나타나셨다. 그만 들어가서 자라고 통 사정을 해도 우리는 절대 잠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선생님은 집으로 가 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50대 후반 쯤 되었던 것 같은데 그때 우리 눈에는 할아버지로 보였다. 할아버지샘이 삐져서 가버렸다며 우리는 또 한바탕 호들갑을 떨었다.

 

그때의 인연이 강산이 네 번도 더 변하고도 남은 지금 다시 이어졌다. 야들야들 가늘게 엮였던 것이 세월 속에서 제 나름대로 여물었나보다. 한국서 왔다고 하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열리는데 한 아름 우리의 옛이야기를 안고 있는 사람이니 오죽하랴. 영옥이 언니는 내 앞에 갑자기 떨어진 소중한 선물이 되었다. 누군가와 먼 추억 속, 그 시간 그 감정으로 돌아가서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한 여름 밤에 목청껏 불렀던 쪼이나쪼이나가 생생하게 들린다. 월내의 촉촉한 모래사장과 달빛을 등에 업고 출렁이던 파도는 지금도 잘 있을까. 달려가 볼 수 없는 먼 곳이기에 더욱 그립다.

 

아무런 생각 없이 훌러덩 거리며 지나온 시간이 돌아보면 귀하고 귀한 순간이었다. 지금 무심코 스치는 인연도 또 먼 훗날 갑자기 찾아오는 옛 인연이 되어 줄 지 모르는 일. 내 곁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새삼 소중해진다.

 

 

기사 입력 : 2019-01-31 15:04:08 최종 수정 : 2019-01-31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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