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아 놀자
한 남자가 있었다. 직업은 의사, 아내와 두 자녀를 가진 가장이다. 어느 날 그는 생각했다. ‘나’라는 존재는 과연 정신일까. 육체일까. 육체는 정신을 담고 있는 그릇일 뿐, 진정한 ‘나’는 생각하고 연구하는 정신이 아닐까. 이 답답한 물질의 세계에서 벗어나 형이상학적인 삶을 마음껏 누리는 길은 육체를 버리는 것이다.
그는 더 깊이 연구를 했다. 뇌는 일정한 영양 공급을 해주면 기능을 한다. 그러므로 뇌를 따로 분리하여 뇌가 필요로 하는 영양액에 담가두면 늙고 병드는 육체의 제약 없이 영원히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결심 했다. 아내의 동의와 친구 의사들의 도움으로 결국 육체를 버렸다. 어항처럼 투명한 표본병에 담긴 뇌는 집의 거실 복판에서 오가는 아이들의 ‘아빠, 안녕’ 소리를 들으며, 정신의 심층으로 잠수함으로써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묵상을 하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아내와 자녀가 모두 죽었다. 대를 이어가며, ‘연구하는 할아버지’란 존경을 받던 뇌는 구석으로 밀려다니다 결국에는 개구쟁이 아이들의 손에 의해 영양액에서 끌려나온다. 그는 농구공처럼 허공에서 이리저리 던져지다가 결국은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중 ‘완전한 은둔자’ 이야기다.
2006년에 두서없이 등단을 하고나서 몇 년 간 슬럼프에 빠졌다. 글을 쓸 수가 없었다. 한창 열의를 가지고 습작을 해야 할 시기를 허망하게 흘려보냈다. 그런데 그런 현상은 나만 겪는 게 아니었다. 많은 문우가 등단 후 글이 써지지 않는다고 하소연을 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나도 연구(?)를 해 보았다.
협회의 회장직을 맡으면서 생각한 것이. 어찌하면 회원들이 글을 많이 쓸 것인가. 이었다. 물론 누가 글을 쓰라고 해서 써지는 것은 아니지만, 협회를 통하여 최소한 글을 쓰고자 하는 분위기는 한번 만들어 보고 싶었다. 번잡한 일상을 벗어나, 단 몇 시간이라도 글 쓰는 일에 은둔할 수 있는 곳은 없을까. 뇌를, 정신을 담아 놓은 표본병처럼, 글을, 글 쓰는 열의를 담아 보는 물리적 공간을 만들어 보자. 해서 생각해 낸 것이 동네방 모임이다.
월례회 이외에 한 달에 한 번, 가까운 지역 문우들이 그룹이 되어 부담 없이 만나는 사랑방을 만들었다. 좋은 책을 소개하며 함께 나누고, 또 각자 작품을 놓고 토론도 하다 보면 글쓰기에 의욕도 생기리라 하는 바람이었다. 동네방이 꾸준한 글쓰기의 영양액을 제공해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다행히 많은 회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글쓰기에 도전을 받게 된다고도 한다. 무엇보다 밤운전이 어려워 월례회에 참석을 미루던 회원들도 낮시간을 이용해 함께 한다는 것이 반갑다. 시간이나 사정이 여의치 않은 회원들을 위해서도 다른 방법으로 운영 될 동네방을 의논해 보려고 한다.
수필가는 수필을 써야 한다. 베르베르의 ‘은둔자’처럼 갇혀만 있는 생각이 무슨 소용인가. 육체가 없는 사유만의 뇌가 사람이 아니 듯, 수필도 마찬가지다. 머리 속에서 생각만 떠 올리는 것, 메모장을 몇 권 써 놓았다 한들 그게 무슨 의미인가.
머릿속에 담아놓은 무수한 생각과 글이 더 이상 정처없이 떠돌다가 사라져 버리게 해서는 안된다.
써야 한다. 생각을 세상 밖으로 꺼내어 소통 시켜야 한다. 문자를 써 넣고 문장을 만들고 수필이란 그릇에 담아내어야만 수필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의 것을 잡아라. 조절하지 마라. 살아 있으라. 쓰라. 그냥 쓰라. 그냥 쓰기만 하라.’ 나탈리 골드버그의 말처럼 그렇게 ‘뼛속까지 내려가며’ 열심히 쓰자. 2013년을 수필과 즐거이 벗하는 해로 만들자.
벌써 우리 재미수필문학가협회 회원들의 합창이 들리는 듯하다. “수필아, 노올자.” <퓨전수필 2013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