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뉴질랜드 동생의 ‘행복 식당’

최미자 / 수필가
최미자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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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연락을 못하고 살다가 두 해 전부터 소식이 닿은 그리운 사촌 동생. 뉴질랜드로 이민 가서 20년이 넘도록 식당을 운영한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아이들 셋 키우며 얼마나 분주하게 살지 궁금했다. 편지를 보낸 적이 있는데 답장이 왔지만 너무 간단했다.

그 후 무심히 지나다가 스마트폰 덕분에 전화할 수 있어서 요즈음 종종 안부를 전한다. 동생은 나와 전화를 할 때마다 손으로 무엇인가 늘 일을 하고 있다. 한번은 뭐하느냐고 물었더니 만두를 빚고 있다고 했다. 거의 하루 종일 만든단다. 커다란 양푼에 아마 천 개쯤. 손님의 입에 맞게 양배추와 양념소고기만을 넣은 만두란다. 정말 부지런하다고 칭찬했더니, 아이구 언니, 내가 전생에 얼마나 게을렀으면 이렇게 맨날 죽어라 일만 하고 사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동생 부부는 천주교 신자다.

내가 고국을 떠날 때 두 사람은 연애 중이었다. 그 후 결혼해 시댁 아파트 목욕탕에서 큰 이불 빨래를 혼자 발로 지근지근 두발로 밟은, 서러운 하소연을 편지로 써 보냈기에 나는 그 광경을 미국에서 상상하며 측은해했던 아이다.

내가 대학생 때 일곱 살이던가. 아주 순둥이 자기 언니와는 달리 깜찍하고 야무진 실속파여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됐는지 늘 궁금했다.
 
식당을 사이좋게 운영하는 남편은 어떻게 만났느냐고 물었더니 서울 조계사에서 만났단다. 천주교 세례를 받고 살아 온 두 사람이 열린 마음으로 화통해서 정말 멋지다. 동생은 지금 인터넷으로 인생 공부하느라 한 스님의 금강경 강의에 빠져 있다고 했다. 인생 고행의 답을 찾고 있는 중이다.

지난해도 뉴질랜드는 마스크를 쓴 적이 없다고 한다. 장례식도 평소처럼 서로 껴안고 인사하고 모든 것이 정상으로 살고 있다고 한다. 다만 그곳의 총리는 공항의 출입을 막아 자국민을 보호했다. 처음 코로나 발생 시에 한 달 반 정도만 가게를 닫았을 뿐이다. 정말 부러웠다. 4월 19일에 드디어 공항 문이 열렸기에 호주에 사는 아이들이 5월에 온다며 기뻐했다. 그동안 손자는 자라서 아장아장 걷게 되었다.

식당의 손님들은 거의 현지에 사는 단골들인데 가끔은 같은 동양인이 오히려 무례하게 행동해 속상하단다. 식당 이름도 프랑스어로 대한민국이다. 동생은 가정학과를 나와서 요리솜씨도 좋을 것이라고 말했더니 식당 운영하면서 차츰 배운 거라며 겸손히 말한다. 웨이트리스가 있었지만 무단결근하고 속상하게 해서 부부가 직접 다 맡아 하고 있다.

얼마나 힘들까마는 일주일에 한번 골프도 한다. 틈을 내어 각자 학구적인 생활도 하면서 늘 인생을 탐구하고 있다.

오늘도 통화 중 계속 뭐하는 소리냐고 물으니 양파를 가득히 썰고 있다 했다. 고객 상에 나가는 반찬도 통에 담아 주기에 버리는 음식이 없다고 한다. 남은 음식은 손님이 모두 가져가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일하면서도 스스로 마음이 행복하고 감사하면서 사촌 동생은 그곳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