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민달팽이와의 전쟁

최미자 / 수필가
최미자 / 수필가 

[LA중앙일보] 발행 2020/06/05 미주판 16면 기사입력 2020/06/04 18:47

처음 미국 와 살며 놀란 일들이 많았다. 넓은 국토, 50개 주가 헌법 아래 질서있게 살아가는 모습, 숨 막히는 높은 빌딩이 아니라 단층 상가들 등등.

여기에 더해 놀란 것은 넓은 미국 주택의 정원에 사는 우렁이만한 큰 달팽이들이었다. 뭐든지 크다고 느꼈다. 집에 온 손님들도 달팽이를 볼 때면 삶아 먹자고 농담을 했다. 난 한국에서 달팽이 같은 작은 고동을 쫄깃하고 맛있다며 한때는 좋아했지만, 우리 마당에서 징그러운 달팽이 떼를 본 후로는 안 먹는다.

무엇보다 속상한 일은 기다림 끝에 땅 위로 올라 온 꽃봉오리를 야금야금 먹는가 하면 야채 모종을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태양이 뜨는 시간에는 숨어 있다 밤에만 활동하는 달팽이들. 하는 수 없이 퇴치약을 사다 주변에 놓으면서도 한숨을 쉬곤 했다.

한번은 달팽이를 피해 현관에 작은 상추 텃밭을 만들었는데 아침에 나가보니 또 아무것도 없었다. 이 고약한 놈들. 비만 내리면 맞은편 집 정원에서 100여 마리가 떼를 지어 길을 건너 우리 집으로 온다. 정원을 가꾸는 이웃에게 물었더니 우유통에 집어 넣으란다. 왕 달팽이가 사라진 후에는 민달팽이 떼들로 골치를 앓고 있다. 영어로 슬러그(Slug)라고 하는데 땅 색깔과 거의 비슷해 알아보기가 힘들다. 내가 며칠 소탕작전에 소홀하면 통통하게 살이 찐다.

나도 선전포고를 했다. 이른 아침과 저녁이면 나무젓가락을 들고 돋보기를 끼고 텃밭으로 출근했는데, 오랜 가뭄으로 한동안 그 언짢은 일도 그만 두었다. 그러다 지난해에 비가 흠뻑 내려서 또 다시 슬러그와 전쟁하고 있다. 오랜만에 치커리 상추가 올라왔고 아름다운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났기 때문이다. 씁쓸한 맛의 치커리 상추는 잘 자라는 편이라 달팽이랑 나누어 먹으려 했지만, 여전히 야채 모종과 꽃들을 싹쓸이 해버리니 용서할 수가 없다. 정원의 해충이다.

비옥한 땅을 만들려고 해마다 거름 흙을 사서 부었는데, 하루는 친구가 시에서 무료로 주는 컴포스트를 사용하라고 한다. 남편과 둘이서 먼지를 뒤집어쓰며 힘들게 퍼왔는데, 흙에서 잡초가 마구 들끓기 시작했다. 과일도 종종 이상한 모양으로 열리니 흙 속에 무슨 약이 들어있는지 몰라 다시 홈디포에서 유기농 컴포스트를 사다 부었다. 이처럼 수년 걸려 만든 우리 집 유기농 땅을 달팽이 제거약으로 망칠 수는 없다. 맥주도 안 마시니 날마다 캔을 놓을 수도 없고 일일이 잡는 수밖엔.

달팽이와 눈싸움 끝에 난 눈을 질끈 감고 젓가락으로 잡아 놈들을 깜깜한 우유 통 속으로 던져버린다. 아, 어쩌나. 불교에서는 십악참회 중에 제일 먼저 실천항목이 살생하지 말라는 것인데, 나는 죄인이 된다. 하는 수 없이 기도로 매달린다. ‘발보리심, 성불해탈!’ 하필이면 그 순간에 만나야 하는 우리의 운명을 한탄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