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향기처럼

1. 지조의 삶

   여러 해 전, 우리 집 뜰에 레몬나무를 심었다. 역사적으로 고대부터 중국과 아시아에서 자랐다는 감귤과의 나무들은 우리 아시아인들처럼 강인하다. 고국에 살 때, 다른 나무들은 동면을 준비하는데 겨울이면 제주도에서 수확되는 달콤한 감귤이 난 신기했다. 이미 온 후, 우리 집 뜰에서 감귤과 나무를 키우고 있다. 우리가 삶의 절망을 딛고서도 오뚝이처럼 일어나듯이 차가운 겨울공기를 마시며 감귤들은 달콤하게 익어간다. 감귤나무와 달리 레몬나무는 일 년 내내 꽃을 피우며 자란다. 과즙이 많고 신맛이 강한 레몬은 다양하게 사용되며 화장품도 재료로도 이용된다. 아랍인들에 의해 퍼졌으며 지중해연안이 주 생산지란다. 내가 살고 있는 기후가 온화한 캘리포니아에서도 19세기 후반부터 대량 수확을 하고 있다. 생애동안 가지들 중의 일부는 시들며 죽어가기에 생과 사도 함께하는 나무이다. 나무를 잘 키우려니 일 년 내내 가지치기를 하며 비료도 주고 돌보아주어야 한다. 지난주엔 수십 년만의 이상기후로 밤 기온이 영하 근처까지 떨어졌다. 다음날 아침 나와 보니 연약한 새 잎 파리들이 얼어 죽었지만 열매는 여전히 건강했다.

우리 집에는 껍데기가 오돌토돌하고 끝에 혹이 튀어나온 원산지가 이탈리아인 유리카(Eureka)종이 있다. 아직 수확량이 많지 않아 일 년에 대여섯 개 열린다. 친정어머니가 즐기던 레몬이라 길러서 좀 갖다드리려고 심었는데, 몇 해 전 어머니는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쓰레기를 재활용하느라고 부지런히 뿌리 쪽 땅 속에 음식찌꺼기를 묻었더니 올해는 사과처럼 크고 탐스럽다. 레몬나무 앞에 서 있으니 문득 나의 친정모친 생각으로 가슴이 찡해 온다. 레몬이 지닌 바이타민 c의 영양제처럼 온갖 재능을 가진 분이었지만 한 여인으로서의 운명은 순조롭지 않았다. 삶의 지혜도 배우며 때론 답답한 내 가슴을 털어놓고 의논하고도 싶은데 이제 세상에는 계시지 않으니----. 친정어머니의 그리움으로 금방 내 눈시울은 뜨거워진다.

   넉넉한 환경에서 어머니가 여학교를 다니던 15살 때 나의 외할아버지가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기에 외할머니는 여학교를 마친 딸을 결혼시켰다. 시집간 여동생이 궁금하여 순천의 시댁으로 사촌오빠(이재송)가 찾아 온 적이 있었다. 부엌 아궁이의 연기를 뒤집어쓰며 풀무질하던 어머니를 보고는 외삼촌은 부엌문간 저만치 서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귀하게 자란 고운 여동생이 시집살이 하는 모습에 놀라서였다. 시종들이 있다지만 네 시동생과 네 시누이가 있었으니 큰 며느리였던 나의 어머니는 끼니마다 얼마나 분주했을까. 갑자기 시어머니가 고혈압으로 별세하는 바람에 당신의 아들과 나이가 같은 막내시동생을 어머니는 나란히 껴안아 품고 젖을 물리며 키웠던 큰 형수였다.

결혼하고 보니 시댁은 사업이 기울어 빚쟁이로부터 모든 살림에 차압딱지가 붙기 시작했다. 시아버지가 맨발로 내려와 우리 며느리 살림만은 차압을 붙이지 말라며 통사정을 하더란다. 시댁이 어려우니 며느리인 어머니는 친정의 재산을 끌어다가 도우지 않을 수 없었다. 금비녀까지 팔아 시동생(최을수)의 결혼 비용을 보탰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나의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만주로 이사 갔다. 아버지는 은행에서 일했다. 만주 이웃집에는 일본인 ‘다니꾸지’씨 네가 살고 있어 아주 친하게 지냈다. 해방이 되자 다니꾸지 가족은 일본으로 귀국했다. 나의 친정 부모님도 삼팔선을 넘어 와 빛 고을 광주에 가족들의 집터를 잡았다. 신문사와 도청, 교육청과 시청에서 유달리 청빈하게 일했던 아버지 탓에 우린 고생이 많았다.

나의 친정 부친이 대구의 식산은행 지점장으로 갔던들 우리 가족의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어머니는 때때로 아쉬워했다. 장남의 책임감 때문에 아버지가 부모와 가까이 살기로 한 결정은 우리의 운명이었다. 상황에 따라선 아무리 가족이라도 혀를 굳게 깨물어야 했었는데, 주판을 능란하게 굴리며 상과 공부(당시 전문상고)를 했던 아버지는 전공과 달리 영 다른 분야로 발을 디뎠다. 아버지는 결국 과로와 고혈압으로 쓰러졌다. 갈수록 기울어가는 가세, 사춘기에 방황하던 문제아들까지 엎치고 덮치던 우리 집. 여고생이 된 나도 한이 서린 청춘을 눈물로 보냈었다. 그리하여 어머니의 강인한 삶과 용기들은 내가 살아가도록 자극을 주었다.

주변사람들과 내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들은 늘 화두였다. 각자의 운명, 인연, 삶과 죽음, 부자와 빈곤, 양반과 상놈. 그런 차별과 고통의 원인들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지금도 끝나지 않은 나의 그런 고민들이 이렇게 내가 수필을 쓰도록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외할머니가 중매장이에게 속아 나의 어머니를 결혼시키는 바람에 우리도 태어났다. 어머니가 예정대로 일본으로 유학을 갔더라면 훗날 어머니는 멋진 음대교수가 되었을지도 모르니깐.

   학창시절 검도선수였던 친정아버지는 무척 가정적이고 일편단심 아내를 사랑했다. 하지만 훗날 한때 불효자식을 키워낸 것도 아버지였다. 부족한 자식을 뛰어난 자식과 비교하며 무서운 매로 교육했기 때문이다. 쉰을 넘기고 불구가 된 친정아버지의 손과 발이 되어준 어머니의 눈물겨운 6년의 세월. 수척해진 몰골의 어머니 가장은 그래도 지역사회에서 존경을 받았다. 당신이 필요한 곳이면 언제든지 달려가 봉사하고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어른들은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온 분들이 몇 되지 않았기에 지성을 갖춘 정의로운 어머니를 동네반장으로 뽑은 것이다. 자유당시절이라 당원으로 선거운동을 해달라며 날마다 위협적인 강압을 받았을 때도 어머니는 이승만의 독재가 싫다며 강하게 버티었다. 아버지의 직장에 영향이 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도 굽히지 않던 어머니의 확고한 지조를 보았던 어린 나는 지금도 자랑스럽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과로와 정신적 고통으로 결국 인천의 요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 후 건강을 겨우 회복한 어머니에게 아름다운 한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일본어로 써진 그 훈훈한 편지 내용을 어머니가 들려주셨다. 만주에서 이웃이었던 다니꾸지 선생이 보내 온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도 안 계신데 참 곤란하다며 그의 한국방문 청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어른들의 일이라 나는 눈치만 보며 조언 한마디도 못했던 당시의 일이 지금은 조금 후회스럽다. 한 때 다정하게 지냈던 친구가족을 만나보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인 것을. 백발이 되도록 간직했던 아름다운 그리움을 어머니는 그토록 매정하게 잘라버렸다. 아마 그가 일본인이 아니었던들 만약 어머니가 잘 살고 있었더라면, 아름다운 우정은 현해탄을 넘었을지도 모른다.

   미국에 이민 와서도 가끔 노인학교에서 어머니를 좋아하는 분이 있다고 난 들었다. “무슨 이 나이에!”라며 어머니는 교제를 하지 않았다. 어떤 분들은 황혼에 짝을 만나 깨를 볶는데 말이다. 그런 어머니의 절개와 지조를 나는 존경한다.

요즈음 아내와 남편을 두고도 버젓이 바람을 피우는 잘못된 성인들. 넘치는 자유의 바람이 일으킨 업보는 결국 누구에게 돌아갈까. 물질 만능이면 세상을 자기 손안에 쥔 것처럼 일부 비뚤어진 삶의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모순 된 현대인들에 난 조금 슬퍼진다.

 

-첫 번째 수필집 ‘레몬향기처럼’ 에서 뽑아 타자를 치며 친척의 이름을 기억하려고 넣었습니다. 이 수필은 장편이라서 다음 글인 ‘한줌의 재’는 생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