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일까 우울증일까
늦은 오전 가족이 브런치를 먹고 있는데 한국에서 나를 찾는 전화가 왔다. 한인회와 인터넷을 뒤져 내 전화를 알아냈다는 친구의 딸이 인사를 했다. 아 얼마만인가. 그 애가 중학생 때 우린 이민을 왔는데 목소리는 똑 같았다. 오늘내일 하는 어머니가 나를 그렇게 보고 싶어 했다며 이제서야 연락을 드린다고 했다.
2016년 내가 잠깐 친구 집에 들렀을 때의 기억이 떠올라 친구 딸에게 말해주었다. 언제나 배짱 있게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거침없이 해대던 친구가 전혀 입을 열지 않았다. 오랜만에 나를 보자 무척 반가워하면서도 내가 말을 건네면 예스하고 노만 말했다. 내 얼굴을 바로보지 않고 남편의 등 뒤에 반쯤 몸을 숨기며 의아하게 행동했다. 그런 내 이야기에 딸은 아마도 그 때부터 엄마가 아팠는데 몰랐던 것 같다고 했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친구 남편은 다정다감한 한의사였다. 작은 플라스틱 백에 빻아놓은 여러 개의 계피가루 봉투 중 하나를 그날도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사람들과 교제를 좋아하는 친구 남편은 고향의 유명 인사들과 늘 외식을 했고 친구도 같이 잘 어울리며 재미있게 산다고 종종 말했다. 그런데 나이를 먹어가면서 내가 가끔 국제전화를 할 때면 남편의 과잉 술버릇을 힐난하며 신세타령을 하기도 하여 조금 놀랐다. 지난 번 한국방문 때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어 어제는 뭐했느냐고 물으니 예전처럼 부부끼리 술 한 잔 했다며 싱겁게 피식 웃었다. 그게 친구와 마지막 대화였다.
친구 딸로부터 두 번째 전화가 걸려왔을 때는 장례식장이란다. 이제 친정이 사라졌다며 전화 속에서 흐느끼는 딸은 발레를 추던 애였다. 고등학교를 나오자마자 우리 동창생 중에서 제일 먼저 결혼한 친구가 처음 낳은 바로 그 딸이다. 여고 때 무용 선생님이 대학교수가 되었는데 그분 연구소에서 딸이 배우고 있다며 친구는 으쓱해했었다.
나는 한국에 갈 때면 늘 들러 친구의 구수한 사람 이야기를 듣곤 했다. 친구는 솔직하게 비판하고 내리치는 말로 모두를 시원하게 웃겨 주었다. 중학교 때는 최초로 맘보와 트위스트를 추어 인기를 독차지 하기도 했던 친구였다. 훗날 깨달았지만 친구도 머리가 무척 좋았지만 그 재주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던 것 같다. 여러 추억이 진하게 스며있던 누문동 상권이 재개발되는 것도 못 보고 조금 아쉬운 나이에 먼저 떠나버린 친구가 안타깝다.
자식들 키우느라 고생한 엄마라며 애통해 하는 친구의 두 딸은 지금 무용학 연구 교수와 컴퓨터 전공자이다. 누군가 서러운 눈물을 흘려주는 사람이 있는 친구의 생애는 그래도 성공한 것 같다. 엄마가 세상을 하직 하려는 의지가 확고해 식사를 거부했고 몸이 앙상한 상태였다면서 지금 생각해보니 치매가 아니고 우울증인 것 같았다고 친구의 딸은 말했다. 할 수 있다면 나도 그렇게 떠난 친구처럼 마지막 삶을 구걸 하고 싶지는 않다. 친구가 다니던 절 여스님의 목탁 소리를 상상하며 49일 간 나도 기도하리라.
7-10-2018 미주 중앙일보 오피니언 란 '이아침에'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