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레몬나무 앞에 서서
[LA중앙일보] 발행 2020/03/11 미주판 19면 기사입력 2020/03/10 19:59
포근했던 겨울 지난 몇 해와 달리 뜻밖에 2월엔 밤이면 강추위가 며칠간 불어닥쳤다. 추위라야 화씨40도 정도이니 섭씨로는 10도 안팎이다. 온화한 해양성 기후대에 있는 샌디에이고는 지역에 따라서 꽃들이 일년내내 피어나는 도시이다. 그런데 밤이면 온 몸이 오싹해지고 손발이 시리는 날씨가 된 것이다. 걱정되어 하루아침 뜰에 나가보니 여러 식물들이 갈색으로 얼어 죽어있다. 선선한 봄 가을이면 만발하던 보라색 세이지가 전멸상태였고, 문주란의 새 이파리들도 모두 고개를 숙이고 얼어 볼품없이 변해 있었다.
그래도 강하게 살아 있는 식물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제일 반가운 것은 못난이 레몬나무와 언덕 구석에서 자라는 오렌지나무가 아직 싱싱하다는 것이다. 레몬나무와 오렌지나무를 샅샅이 들여다보다 난 깜짝 놀랐다. 이파리 뒤쪽에 병충해인 흰혹파리 알들이 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덩어리로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아차하는 순간에 전염병으로 오랜 세월 키워 온 나무의 생명을 빼앗길 뻔했다.
최근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고 있는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 도대체 어떻게 누가 발생하게 했을까.
손으로 만지면 향기가 풀풀 나는 예쁜 레몬을 나는 한국에 살 때 처음 보았다. 외국산 물건을 파는 도깨비 시장에서 본 것이다. 값이 좀 비싸 만지기만 했다. 이 집에 이사와 지인으로부터 선물 받은 첫 레몬나무는 잘 돌보지 못해 죽여버렸다. 미안하여 다시 한그루를 사다 심었는데, 껍데기가 두껍고 오돌토돌한 유레카 종의 레몬나무이다. 해마다 가지치기를 하며 밑둥이 튼튼해지기를 고대하지만 겨우 몇개씩 달린다. 가끔 잡지에서 그림으로 보거나 화장품으로이름만 들었던 그 레몬나무를 우리집 마당에서 기르다니!
나는 샌디에이고에서 레몬나무와 살며 감개무량했다. 한번은 나의 책 출간을 축하해주던 뉴욕의 친구에게 보여주고 싶어, 내가 먹지 않고 정말 큰 레몬을 몇개 소포로 보내기도 했다. 이민초기엔가 나는 꽃꽂이 자격증을 받는 수업을 미국의 고등학교 학생들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레몬잎이 듬뿍 배경 자료로 사용되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 이파리의 레몬향기에 나는 또다시 놀랐다.
친정 어머니의 방에는 늘 레몬이 있었다. 어머니는 레몬즙을 화장수로 사용하시며 나에게도 권하셨지만, 나는 끈적거린다며 싫어했다. 그런데 이제야 나는 얼굴에 생긴 검버섯을 보며 어머니를 그리며 레몬 화장수를 바른다. 레몬나무 앞에 서서 꽃이 몇개 피었나 하나 둘 세고 있으면, 올곧은 성품의 어머니가 생각이 난다. 자식들을 공부시키고 싶어 가게를 열자며 아버지를 조르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아롱거린다.
답답하고 정직한 성품의 아버지는 배짱도 없고 성실했던 가장일 뿐. 동네 반장과 여학교 동창회장으로 추대받고 봉사하셨지만, 우리 집에 전화가 없으니 늘 사람들이 들락거리던 풍경도 떠오른다. 아양을 떨거나 아첨을 싫어하시며 늘 정의로운 약자를 도우시던 신여성이었다.
대학교수였던 나의 숙부가 친구집에 쌀 꾸러 갔다가 대문에서 남로당 빨갱이에게 몽둥이로 맞아죽었던 사실로 우리들에게 반공사상을 철저히 가르쳐주시던 어머니. 팔십이 되어서도 신문을 보고 독서를 즐기시던 분. 지혜로운 어머니의 열정으로 우린 굶지 않았고 대학에라도 갈 수 있었다. 아버지의 와병으로 기울어진 집안 형편 때문에, 내가 대학교를 중간에 포기하려 할 때도 한석봉 어머니처럼 떡장사를 해서라도 등록금을 마련하겠다며 어머니는 나의 학업을 이어가게 해주셨다.
레몬나무처럼 꽃과 잎과 열매가 되어 온몸으로 향기를 피우며 세상 사람에게 도움을 주지는 못해도, 최소한의 인간 도리를 강조하시던 친정어머니의 말씀들. 레몬나무 앞에 서서 나는 깊숙히 자신을 바라본다. 우리가 교육을 통해 인격을 가꾸어 나가듯, 나무도 정기적으로 좋은 거름을 주고 물을 주지 않으면 대부분 병들어 죽어갔다. 나도 그렇게 사람이 되어 간다. 사철 푸른 레몬나무에 향기로운 꽃 한송이가 피어 노랗게 달콤한 열매로 익어 가기까지 아마 반년은 걸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