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동안 고속도로 125번이 열리고 52번 연장선이 집 근처에 들어왔다. 요즈음은 잠시 운전하며 지나가는 프리웨이가 무척 즐겁다. 드문드문 핀 야생화랑 온통 초록이다. 모처럼 봄비에 흠뻑 젖은 산언덕은 스위스처럼 아름답다. 도심동네인데도 안뜰이 넓은 것에 반하여 이 집에 우린 이사 왔다. 밤에 내리던 겨울 빗소리를 듣고 맑은 공기에 일 년 내내 꽃이 피어나는 샌디에이고는 정말 극락이었다. 
우리 가족이 이민 오고 두 해가 지나자 친정어머니는 고혈압으로 남편은 암수술, 이듬해엔 집안 연통에 불이 나서 피 말리던 연이은 삼 년이었다. 이른 아침 출근하고 집에 돌아와 저녁식사 끝나면 코 골고 자버리는 남편. 때론 삶의 목표가 달라 부부 사이 말다툼도 잦았기에 우울증과 건망증마저 나에게 찾아왔었다. 이렇게 살려고 그이가 이민을 가자 했는가 하는 원망도 일어났다. 
게다가 파트타임으로 내가 보조 교사 일을 하던 어느 대낮에 집 창문을 깨고 도둑놈이 쑥 밭을 만들어 놓고 갔다. 돈 몇 푼 벌려고 뛰어다니던 내 인생이 참 허무했다.

    교사의 꿈을 꾸며 일한 4년 끝에 나는 직장 일을 접었다. 영어서류와 잡다한 일들을 누군가 도맡아야 하지 않겠는가. 반신불수가 된 친정어머니를 돌보고, 남편 도시락 두 개 잘 싸주는 공양주 보살이 되자. 무엇보다 사춘기 딸을 바르게 키우는 자식 농사일이 중요하다며 나는 결론 내렸다. 그리고 너른 뒷마당으로 바람난 여자처럼 뛰쳐나갔다. 고국에 살 때 남편의 직장 따라서 16번이나 이사하던 걸 생각하면, 더 큰 집 더 많은 돈을 추구하기보다는 이곳에 뿌리내릴 수 있다는 행복. 얼마나 감사한가. 고향집의 과일 나무들을 하나 둘 사다 심었다. 친정아버지처럼 마당에 철봉과 그네를 만들지는 못해도 청포도 나무가 우거진 유년시절 집을 기억하며 만들어갔다. 친정어머니도 우리 뜰을 보고 지난날의 국화 밭을 그리며 자주 행복을 들먹거리셨다. 나는 구슬땀을 흘리며 흙을 만지다 푸른 하늘을 바라본다. "아버지, 혼이라도 우리 집에 종종 놀러 오세요"라고 소리치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행복했던 정원 일도 해마다 극심한 가뭄이 오고 시에서 물 사용을 통제하는 바람에 오래전 그만두었다. 그런데 웬일이야. 올해는 비가 몇 달 내리더니 뒤뜰이 다시 살아났다. 진한 향기를 뿜던 나르시스와 우아한 극락조. 남보랏빛 아이리스가 쭉 솟아오르더니 지금 만발이다. 오래전 "땅을 파면 돈이 나와! 그만 들어와" 소리치던 남편이 지금은 뜰로 나와 꽃처럼 활짝 웃는다. 내 등 뒤에서 영감이 허리를 굽혀 잡초를 뽑느라 시간가는 줄도 모른다. 문득 머리채 잡고 싸움질하던 어린 시절 옆집 가시내의 사납던 손처럼 나도 잡초들을 마구 뽑고 있으니 추억과 함께 웃음이 절로 나온다---미주 중앙일보 '이아침에' 글--- 2019년 4월














미주중앙일보 '이아침에' 글 -2019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