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 그분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지난해에도 치커리 상추를 내외분이 맛있게 드셨기에 올해도 드렸다. 내가 직접 댁으로 갖다드리려 했더니 그분이 골프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들르겠다 하여 그리했다. 우리 집에 오실 시간을 확실히 몰라 나는 외출했다. 집에 돌아와 남편을 통해 상추를 픽업하였다는 싱거운 이야기만 들었기에, 아무래도 궁금하여 다음날 남편에게 다시 물었다. 대문을 열고 문 앞에서라도 대화는 하였는지 등등. 그런데 집 앞에 서서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고 상추를 담은 봉투를 철창문 사이로 밀어드렸다는 남편의 말에 나는 좀 서운했다. 왜냐하면 신선도를 유지하려고 아침에 조금조심 따서 씻어 놓았기에 상처가 나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 아저씨는 우리 정원의 꽃을 유달리 좋아하셨던 분이라 내가 있었으면 뜰에 앉아서 놀다가시게 했을 터인데, 죄송하여 아침을 먹고 전화를 드렸다. 그분도 지금 상추로 아침을 너무 맛있게 먹고 막 전화를 하려던 참이라며 반가워했다. 우린 늘 그러듯 이이야기 저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엇보다 10년 넘게 한국에서 근무한 그의 아들이 미국에 좋은 직장을 얻어 팔로스버디스에 집을 샀다는 이야기를 신나게 자랑했는데 그게 우리들의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이야.
그리고 두어 주쯤 지났나…. 저녁밥을 먹은 후 푹 쉬고 있는데 그의 아내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빨리 머리가 돌아가지 못했던 나는 수화기를 드는 순간에도 그의 남편이 혹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하면서 걱정했다. 왜냐하면 그가 약 두어 달 넘게 기침을 했기 때문이다. 뜻밖에 그의 아내가 들려주는 긴 사연은 그동안의 과정과 이틀 전에 병원 가서 치료 받고 집에 도착한 후 남편이 별세했다는 소식이었다. 곁에서 오다가다 전화를 엿듣던 내 딸은 놀라서 전령사처럼 아빠 방으로 들락거리며 ‘아저씨가 아프신가봐요’로 시작해 별세 소식까지 세 번씩이나 복도를 오가며 전달했다. 나는 순간 멍했다. 우리 가족도 각자 하던 일들을 모두 멈추었다. 왜냐하면 최근에도 그는 평소처럼 오동통한 얼굴도 그대로였고 건강체질이라며 늘 장담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가을 갑자기 심장에 스텐트 수술을 하는 걸 빼고는 여전히 개인 사업을 하던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또 늘 낙천적인 성품에 어렸을 때부터 넉넉한 집안 출신이어서인지 당당하고 자신 있게 말하며 행동하는 분이었다.
30년 전, 내가 그를 처음 만난 샌디에이고 스키비치 해변 한인회 모임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그 많은 갈비를 구우며 봉사하던 모습에 반해 난 그와 친구가 되었다. 그는 사람을 좋아해 그렇게 한동안 지역사회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얼굴이 둥그런 아저씨는 성격도 변함없었다. 용감한 해병대 출신임을 자랑스러워했다. 학창시절 독서반에서 책을 많이 읽었던 이야기랑 그의 집 서가에 많은 책들이 꽂혀 있었던 것도 내가 그를 좋아한 이유였다. 공군장교였던 우리 그이를 늘 선배님이라고 불렀다. 남편이 집안일 하다 답답해 손재주가 좋은 그분에게 전화하면 바로 달려왔던 그런 우정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오랜 세월 사귀어보니 그는 정의에 불타는 경상도 사나이였다. 정치적 의견도 같아 만나면 나라 걱정으로 우린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다만 우리가 분에 맞추어 검소하게 살아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멋진 외국 차도 사 타보고 해외여행도 가라며 가끔 꾸짖어 나는 짜증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신문의 내 글을 읽으면 반드시 독후감을 전해주는 열렬한 나의 펜이었다. 그토록 유별나고 다정했던 그의 경상도 사투리 목소리를 이젠 더 이상 들을 수 없으니 우리 가족이 슬퍼하는 요즈음이다.
벌써 그가 그립다. 남편은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안타까워 아침마다 현관에서 신문을 픽업하며 “사람, 어찌 그리 허망하게 간단 말이야”라고 읊조린다. 공교롭게도 샌디에이고에서 서로 잘 아는 두 분이 열흘을 사이에 두고 아우 먼저, 선배 먼저 하며 돌아가셨기에 나는 두 댁에 문상을 다녀온 후 유난히도 마음 아픈 시간을 보냈다.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가야하는 길이지만 자주 대화를 하던 사람 사이에서 생긴 갑작스러운 영원한 이별은 나의 머리가 아프도록 견디기 어려웠다. 최근이었지만 그는 생전에 나에게 카톡으로 죽음에 대한 잦은 글과 장난기 섞인 만화 글을 자주 보냈는데 아마 그가 건강에 자신이 없었다는 징후였을까.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에게도 사나이답게 건강한 척 하셨는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난 타인의 죽음을 대할 때면 나의 일처럼 함께 아파하며 새삼스레 우리의 삶에 대하여도 깊이 고민한다. 최근 몇 년 사이 나는 고국에 사는 여고 시절 절친을 3명이나 보내면서 매우 힘들었었다. 그리고 암을 앓던 한 친구와는 고통스러웠지만 자주 작별 인사를 전화로 나누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때론 자신의 마지막 임종을 알면서도 숨기곤 했다. 본인의 죽음에 대한 아쉬움도 있겠지만 남은 사람을 배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평소에 나는 가족에게 내가 죽으면 조용히 화장하고 분주한 세상에 장례를 치를 필요가 없다라는 유언을 말해두었다. 하지만 살아 있을 적에 내 스스로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에게 멋진 마지막 작별 인사를 미리 이야기할 수 있다면 어떨까하며 기발한 생각을 종종 해본다.
돌아보니 내가 임종을 처음 경험한 것은 오래 전 강남 한 병원의 중환자실이었다. 평소에 잘 오고 가지도 않는 사촌 언니가 도와달라는 전화를 받고 평택에서 서울로 올라갔다. 얼마나 급하면 나를 불렀을까. 사실 나는 그 언니의 남동생과 무척 친한 사이였다. 남자 사촌은 해외근무 중이라 귀국할 수 없는 사정이었다. 침대에 누워계셨던 숙모는 왔느냐며 퍽이나 반가워하시며 나의 손을 잡았다. 병원에서 사촌언니랑 교대로 의자에서 쪽잠을 자며 나는 환자를 살피었다. 다음날 사촌 언니는 자기 집으로 샤워하러 갔는데 그 사이에 숙모가 숨을 거두셨다. 그 때 산소 호흡기를 낀 환자가 의식을 잃어버린 채, 신음하는 모습을 사흘 동안 나는 지켜보면서 암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병인지를 처음 알았다.
그런데 최근 별세한 그분을 우리는 어리석게도 코로나19 감염으로 생각했었다.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에도 친구들이랑 골프를 쳤고 마지막 날도 차 안에서 아들과 골프 이야기를 나눈 후 잠을 자듯 그렇게 작별했다고 한다. 차 안의 의자가 뒤로 제쳐있었으니 전혀 가족도 그의 운명을 느끼지 못했다는 후담이다. 한편, 그의 아내와 나는 세상에 드문 행복한 그의 죽음이라고 위안하면서 그가 남긴 휴대폰으로 그의 아내랑 더 자주 대화하고 있다. 작고한 분은 아비로서의 할 일도 모두 하고 가셨으니 세상 미련도 없으실 것 같다. 그의 가족도 나도 믿기지 않는 조용한 죽음이다. 지금도 그 분이 오다가다 전화하고 우리 집을 찾아 와 초인종을 누를 것만 같다. 그와 오랜 우정에 감사하며 나무아미타불, 극락왕생하시기를 기원한다. (미주중앙일보 2020 문예마당 7월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