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8394370.jpg

 

 

<2월에 관한 시 모음> 

  2월 / 오세영

'벌써'라는 말이
2월처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새해 맞이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월,
지나치지 말고 오늘은
뜰의 매화 가지를 살펴보아라.

항상 비어 있던 그 자리에
어느덧 벙글고 있는 꽃,
세계는
부르는 이름 앞에서만 존재를
드러내 밝힌다.

외출을 하려다 말고 돌아와
문득 털외투를 벗는 2월은
현상이 결코 본질일 수 없음을
보여 주는 달,
'벌써'라는 말이
2월만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오세영·시인)


  2월 혁명/ 임영준

이제
한 꺼풀 벗고
당당히 나서 볼까
  
핑곗김에 둘렀던
장막도 걷어야지
  
햇살 마중 나가던
새순의 속삭임이
불을 지폈다
(임영준·시인, 부산 출생)


 2월 / 반기룡

소한 대한
사정없이 빠대고

사천왕처럼
두 눈 부릅뜨고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는
12월 중 가장 짧은 다리의 소유자
(반기룡·시인)
* 빠대다:  아무 할 일 없이 이리저리 쏘다니다


  2월의 신부 / 임명자
  
거문도에는
파도를 건너오는 싱싱한 햇살과
바람만이 문안 드리는
고운 여인이 숨어 있어라

맑은 해초 바람에 매무새 고치며
정월 대보름
그 넉넉한 달빛 가슴에 안기고 싶어
숨막히도록 숨막히도록
수줍은 얼굴로
이 아침 해변에 고개 내민 연분홍 동백
(임명자·시인, 경기도 김포 출생)


 2월 편지 / 홍수희

어딘가 허술하고
어딘가 늘 모자랍니다

하루나 이틀
꽉 채워지지 않은
날수만 가지고도
2월은 초라합니다

겨울나무 앙상한
가지 틈새로 가까스로
걸려 있는 날들이여,

꽃빛 찬란한 봄이
그리로 오시는 줄을
알면서도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1년 중에
가장 초라한 2월을
당신이 밟고 오신다니요

어쩌면 나를
가득 채우기에
급급했던 날들입니다

조금은 모자란 듯 보이더라도
조금은 부족한 듯 보이더라도

사랑의 싹이 돋아날
여분의 땅을 내 가슴에
남겨두어야 하겠습니다  
(홍수희·시인)


  2월 / 목필균

바람이 분다

나직하게 들리는
휘파람 소리
굳어진 관절을 일으킨다

얼음새꽃
매화
산수유
눈 비비는 소리

톡톡
혈관을 뚫는
뿌리의 안간힘이
내게로 온다

실핏줄로 옮겨온
봄기운으로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햇살이 분주하다
(목필균·시인)


  2월의 시 / 정성수

자, 2월이 왔는데
생각에 잠긴 이마 위로
다시 봄날의 햇살은 내려왔는데

귓불 에워싸던 겨울 바람소리 떨치고 일어나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저 지평선 끝자락까지 파도치는 초록색을 위해
창고 속에 숨어있는 수줍은 씨앗 주머니 몇 개
찾아낼 것인가

녹슨 삽과 괭이와 낫을
손질할 것인가

지구 밖으로 흘러내리는 개울물 퍼내어
어두워지는 눈을 씻을 것인가

세상 소문에 때묻은 귓바퀴를
두어 번 헹궈낼 것인가

상처뿐인 손을
씻을 것인가

저 광막한 들판으로 나아가
가장 외로운 투사가 될 것인가

바보가 될 것인가
소크라테스가 될 것인가.
(정성수·시인, 1945-)


 2월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희숙

2월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별이 서툰 자를 위해
조금만 더 라는 미련을 허락하기 때문이고
미처 사랑할 준비가 되지 않은 이에게는
아직은 이라는 희망을 허락하기 때문이고
갓 사랑을 시작한 이들에게는  
그리운 너에게로 거침없이 달려가는
따스한 가슴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이희숙·시인, 1964-)


 2월의 노래 /윤순찬

창생의 달
온 하늘이 열려

지난겨울의 은둔
그 어둠의 침묵
자꾸만 잠겨들던 절망의 기억
모두모두 끝났다.

물이 모이고
하늘이 열리고
빛이 태어나
이제는
희망이 있으리라.
만물이 잠을 깨리라.

바다가 손뼉치고
하늘이 웃는다
찌렁, 나도 웃는다.
(윤순찬·시인, 경북 청도 출생)


  2월에는 / 이향아
  
마른 풀섶에 귀를 대고
소식을 듣고 싶다
빈 들판 질러서
마중을 가고 싶다

해는 쉬엄쉬엄
은빛 비늘을 털고
강물 소리는 아직 칼끝처럼 시리다

맘 붙일 곳은 없고
이별만 잦아
이마에 입춘대길
써 붙이고서
놋쇠 징 두드리며
떠돌고 싶다

봄이여, 아직 어려 걷지 못하나
백리 밖에 휘장 치고
엿보고 있나

양지바른 미나리꽝
낮은 하늘에
가오리연 띄워서
기다리고 싶다
아지랑이처럼 나도 떠서
흐르고 싶다
(이향아·시인, 1938-)


 2월의 마지막 날 / 나명욱

2월의 마지막 날에는
누구도 슬퍼하지 말자

곧 3월이 오고
종로며 광화문 거리에도
꽃과 초록 잎의 화분들이 즐비하게
우리들을 환한 웃음으로
맞이할 테니까

2월의 마지막 날에는
새로운 희망을 꿈꾸어 보자
아직 가보지 못한
하늘 공원도 가보도록 하고
친구가 사는 동네의
일산 호수공원에도 꼭 한번은 찾아가자

가까운 중랑천 자전거 도로에서
어릴 적 날들을 떠올리며
씩씩하게 자전거도 타고 달려보고
올 봄에는 연극 한 편도
혼자라도 가서
흐뭇하고 여유롭게 앉아서 보는
나만의 시간을 갖도록 노력하자

행복은 다른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만드는 만족일 테니까
(나명욱·시인)


 2월의 당신에게 띄우는 편지 /이채

모든 것이 순탄하리라고 믿기로 한다
꼭 그럴 것이라고 믿어보기로 한다
나무에 물이 오르고 꽃이 피고 푸릇푸릇 잎이 자랄 때
나의 하루하루도 그러하리라고
햇살이 따뜻하니 바람도 곱고 아늑하리라고
누구도 대신 걸어줄 수 없는
이 넓은 세상에 새로운 길 하나 내어 보기로 한다

길이라 함은 누군가 걸었기에 길이 된 것이리
아무도 걷지 않았다면 길이 될 수 없겠지
큰길에는 분명 수많은 발자욱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 하나하나의 눈물과 고뇌가
흐르고 흘러 강물 같은 길이 되었을 것이다
바람에 가지가 휘어지고 잎새 우는소리 들려와도
담담한 용기를 가져보기로 한다

봄은 그리 길지 않고 하루의 절반도 어둠이지 않던가
새들의 노랫소리가 위안이 되고
그 길에서 이름 모를 풀꽃들이 나를 반겨줄 때
더러 힘겨워도 견뎌낼 수 있으리라
조금은 쓸쓸해도 웃을 수 있으리라
풀잎 스치는 바람에도 나 행복하리라

하루의 끝에는 늘 밤을 기다리는 노을이 붉지
먼 훗날 나 노을처럼 아름다울 수 있을까
때를 알고 자리를 내어주는 낙엽처럼
그렇게 고요하게 순응할 수 있을까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 오면
한 알의 씨앗으로 흙 속에 묻힐 수 있을까
사람이여!
(이채·시인)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