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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무덤으로 가시고 화로엔 숯불도 없고 아 다 자란 아기에게 젖 줄 이도 없어 외로이 돌아앉아 밀감을 깐다.

옛이야기처럼 구수한 문풍지 우는 밤에 마귀할미와 범 이야기 듣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던 따슨 아랫목

포플라나무 꼭대기에 깨어질 듯 밝은 차운 달을 앞뒷산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개가 짓는다.

―조지훈(1920∼1968)


알려지다시피 조지훈은 정지용의 추천으로 시인이 되었다. 그때는 시인 되는 과정이 지금과 조금 달랐다. ‘추료(推了)’라고 해서 추천을 3회 완료해야 비로소 시인이라고 불러줬다. 조지훈은 1939년도에 첫 작품을 추천받고 그다음 해인 1940년 2월에 추천을 완료했다. ‘문장’지에 실린 마지막 추천 작품이 그 유명한 ‘봉황수’와 많이 알려지지 않은 ‘향문’ 등 두 편이다. 햇수로는 80년도 더 지났지만 계절상으로는 딱 이맘때다. 1940년의 2월에 스무 살 청년 조동탁은 시인 조지훈이 되었다.

추천 완료를 축하하는 글에서 정지용은 조지훈을 “회고적 에스프리”를 지닌 신고전의 시인이라고 칭찬했다. 예스러운 세계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다는 말인데, ‘동야초’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십분 느낄 수 있다.

 

이 시는 상당히 묘하다. 내용은 짧지만 구성이 풍성하고 장면 전환도 역동적이다. 1연은 먼 풍경인데 2연에서는 가까운 풍경으로 확 좁혀진다. 2연은 먼 과거인데 3연에서는 오늘의 현실로 확 좁혀진다. 따라서 읽다 보면 영화를 보듯 파노라마가 휘리릭 지나간다. 게다가 근엄한 이미지의 시인 지훈이 본인을 ‘다 자란 아기’로 표현하면서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모습이 퍽 인간적이다. 이렇게 시인 지훈이 탄생한 달, 겨울밤의 정취와 시인 지훈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시를 즐기는 것은 우리의 작은 기쁨이 될 것이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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