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단테 칸타빌레 / 정영자

 

 

바이올린 선율이 빗소리에 잠긴다. 벽에 걸린 시계는 4시 5분을 가리키고 있다. 돌아올 시간이 지나자 별일이 없으리라 생각하면서도 걱정이 앞선다. 바쁘다는 이유로 미적대는 나를 보며 혼자 가겠노라 나서던 그이의 뒷모습이 눈에 밟힌다.

 

언제부터인가 남편의 주거공간이 되어버린 거실을 둘러본다. 빼곡하게 정리된 책과 서류, 가지런히 꽂힌 필기도구, 애지중지 키우던 강아지 사진, 초록빛이 무성한 몇 개의 화분, 그리고 커다란 약상자가 놓여있다. 늘 제자리를 고수하는 그것들은 남편의 손길로 소중하게 다루어진다. 내가 연필을 썼다가 다시 꽂아 놓아도 알아차리는 걸 보면, 아마도 눈을 감고서도 필요한 것들을 찾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약상자 뚜껑을 열면 약봉지가 줄지어 놓여있고 받아 온 날짜와 시간, 복약 방법 등이 상세하게 적혀있다. 답답하리만치 꼼꼼한 그의 이런 버릇은 다분히 의도된 행동인지도 모른다. 남에게 관대하고 정 많은 그의 성품 탓에 어려운 부탁도 거절하지 못하다 보니 금전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냈었다.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육신에 병으로 남아서 힘들게 하는가 싶다. 한 해 두 해 고통스럽던 기억의 흔적들은 스러져갔지만, 그의 몸에 남긴 아픔의 상처는 시간이 흘러도 온몸을 돌아다니며 불쑥불쑥 솟아났다. 정기검진을 받으러 갈 때마다 좀 나아졌을 거란 기대를 하며 기다리지만, 여전히 그의 손엔 약봉지가 가득 들려있다.

얼마 전 일이다. 아무래도 오래 못 살 것 같다며 힘없이 웃는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심히 넘기는 척했지만, 아내인 나도 모르는 고통을 참아내고 있음에 울컥했다. 주말에 외출했다 들어오면 책장에 기대어 앉아 TV를 보는 그에게 미안하다. 다녀왔노라 건네는 말에 묵묵부답인 채, 가벼운 눈짓으로 답을 하는 그 의미가 온종일 외로웠다는 표현이라는 것을 어찌 모를까. 그렇다고 외로웠냐고 물어본 적도 없었다. 자기 일에 파묻혀 지내다 주말에는 편히 쉬는 게 좋다는 사람이라 그저 그러려니 했다. 아내를 위한 나름의 배려 뒤에 숨겨놓은 일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의지하고 살아온 날들이 집 안 구석구석에 먼지처럼 쌓여있다. 타인에게 어떻게 비칠지 전전긍긍하던 나에게 침묵으로 지켜준 그의 시간이 나에겐 약이 되었다는 걸 그이는 알까.

가을날은 왜 이리 빨리 저무는지…. 어둠이 내리는 창가에 서서 내려다보는 거리에 자동차 불빛이 바쁘게 지나간다. 어차피 지나갈 시간인데 왜 저리 서두는지 모르겠다. 산다는 것을 죽음 쪽에서 보면 점점 죽어오고 있다는 것이라 하거늘 애써 서두는 삶들이 고달파 보인다.

언제 바뀌었는지 묵직한 첼로의 음률이 주위를 감싼다. 정숙하고 진중하며 우수 어린 선율 ‘안단테 칸타빌레’, 톨스토이도 이 곡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지. 차분히 어루만지는 곡조가 언제나처럼 마음을 달래 준다.

 

기다리던 그이가 왔다. 약봉지를 가득 안고….

사랑하면 보인다고, 어디에 가 있어도 함께 있는 게 보인다며 내밀던 따스한 손을 덥석 잡는다.

 

 

※안단테 칸타빌레 : ‘느리게, 천천히 노래하듯이’ 표현하라는 음악용어의 하나로, 차이코프스키의 현악 4중주곡 제1번 제2악장의 곡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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