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벗 / 허정진

 

늦은 오후다. 자폐증에 빠진 괘종시계가 새벽인지 저녁인지 5시 근처에 멈춰 있다. 나이 든 나도 낡아가는 가구처럼 하나의 정물화가 되어간다. 무기력하게 한 곳만 응시하는 집중 아닌 집중, 시간을 다 써버린 사람처럼 넋 놓고 얼이 빠져 지낼 때가 많다. 찾아주는 사람 없는 허전함, 사람도 사람에게 한때라는 서운한 감정에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마음이 흔들리기도 한다. 불쑥 뱉은 혼잣말에 섬뜩 놀라는 이질감이 들 때마다 마른풀처럼 외로운 그림자도 짙어만 간다.

말벗이 필요한 세상이다. 산업화와 정보화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는 더욱 멀어져만 가고, 사람이 배제된 가상공간은 갈수록 외로움과 고독감을 키워간다. 핵가족화되고, 마당이 없는 집에서 살고, 1인 가구가 많아진 탓에 얼굴 마주할 대화 상대도 없어졌다. SNS가 말벗의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보고 싶은 사람의 온기와 향기와는 근원부터 다르다. 시간은 남아도 마음의 여유는 더 가난해진 것 같다.

노인들의 우울감 해소나 정서적 안정을 돕기 위해 지자체마다 ‘찾아가는 말벗 서비스’라는 것도 운영하고, 독거노인을 위한 인공지능 로봇도 효도선물로 인기다. 하물며 고부간에도 돈보다 말벗이 되어주는 며느리가 최고라고 하지 않던가. 영국에는 ‘외로움 장관’도 있다. 사르트르는 ‘타인이 지옥이다.’라고 했지만, 피에르 신부는 ‘타인과 단절된 자신이야말로 지옥’이라고 응수했다.

말벗이라고 꼭 사람만은 아닌 모양이다. 반려동물이나 반려식물과도 충분히 교감을 나눌 수도 있다. 생명체가 아니어도 좋다. 자기가 좋아하는 물건을 활물(活物)화하거나, 인형이나 화상처럼 영혼을 부여해 비밀의 요정이 되기도 한다. 혼자 사시는 어머니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아나운서나 출연자를 상대로 혼잣말을 주고받는 재미로 외로움을 달랜다.

함께 이야기를 나눌만한 친한 사람이 말벗이다. 마음의 공감도 없이 그저 흥만 가지고 너나들이하는 사이보다 서로의 삶을 존중하고, 시대적인 환경과 인식을 공유한다면 좋은 말벗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런 이해관계나 의무감이 없어도, 설사 가치관이나 정서가 달라도 진솔한 마음과 태도가 동반된다면 세대나 성별을 뛰어넘어 서로 이해와 소통을 할 수 있는 일이다.

흔히들 말벗할만한 상대가 없다고 한다. 어쩌면 나를 위한, 내 입맛에 맞는 사람만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상호 간에 동등한 말벗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에 동조하고, 내 감정에 충실하고, 내 말에 집중하는 그런 사람만을 요구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집사 같은 말벗은 세상에 없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이지 않고, 공평하면서도 평등하고, 틀린 게 아니라 다름을 전제로 한 마음 자세가 선행되어야 할 일이다.

같이 있다고 모두 말벗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사람을 앞에 두고도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는 사람들처럼 만날수록 공허해지고, 모일수록 소외되는 일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다. 단지 무료함과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굳이 시간 보내기식의 대화 상대라면 말벗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평생 같이 산다고, 연인이나 친구, 오래된 동창이나 동료라고 모두 말벗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나이가 들었다. 친구들도 대부분 은퇴하였다. 모이면 앞으로 살아갈 긴 여생에 걱정들을 한다. 무엇보다 부부 사이가 문제라고 한다. 온종일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는 생활도 생경하고, 얼굴 맞대고 있는 사람이 배우자뿐이라는 사실도 새삼스럽다. 삼식이니, 강아지 처지 운운하며 우스개 소리하는 친구도 있지만 의외로 아내와 같이 집안일하고, 같이 산책하고, 같이 커피숍 들리며 뒤늦게 말벗이 되어 알콩달콩한 재미에 빠졌다는 친구도 있어 보기에도 좋았다.

누군가에게 제대로 말벗이 되어준 적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진정 상대방의 처지나 속마음을 헤아려보기는커녕 때로는 귀찮아서 듣기 싫어하거나, 무슨 해나 될까 봐 외면하거나, 마지못해 듣는 둥 마는 둥 하지나 않았을까 싶다. 죽음이나 실연, 실패 앞에서 위로나 동정 아닌 내가 당사자의 입장이 되어 진심으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지 한 번쯤 돌아볼 일이다.

혼자 산다. 밤이나 낮이나 말 한마디 나눌 사람이 없지만 외로움이라기보다는 달콤한 고독이라고 여긴다. 떠들썩하고 화려한 것보다는 조용하고 쓸쓸한 것을 즐겨하는 성격 때문이다.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는 일도 없고, 가능하면 남의 정서에도 관여하지 않으려 한다. 상처받기 두려워 관계 밖에서 혼자만 편리해지려는 습관에 익숙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남들이 보기에 딱한 모양인지 밥 사준다고 불러내고, 강아지 한 마리 줄 테니 키워보라고 권유하지만 도리어 시큰둥이다.

문제는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나와 다르다는 데 있다. 부모는 내가 열심히 말해주기를 원하고, 자식은 내가 열심히 들어주기를 바란다. 친구들 또한 까다로운 사람보다는 누구하고도 원만하게 지내는 무던한 사람을 선호한다. 그럴 때마다 나의 삶의 태도가 어쩌면 편벽된 관점에서 오는 자가당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캄캄한 밤길을 걸을 때 도움이 되는 것은 날개도 등불도 아니고 곁에서 걷고 있는 동무의 발걸음 소리다.’라는 발터 벤야민의 말도 떠올려본다.

가장 아쉬운 것은 살아생전 아버지와 허심탄회한 말벗이 되어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남자는 무뚝뚝하다는 이유로, 부자 사이는 어색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했다. 친구가 많지 않고 내향적이고 혼자 사색하기 좋아하는 아버지에게 그저 당신이 좋아서 아무 말이 없는 줄로만 알고 모른 척했다. 하지 못한 질문과 듣지 못한 대답을 영원히 가슴속에 불효로 남기게 되었다.

말을 많이 주고받는 사이가 아니어도 좋겠다. 서로 속내를 알고 허물없으면서도 때로는 무심할 수 있다면 이미 수많은 침묵의 언어를 주고받는 것과 같을 것이다. 눈만 뜨면 이념이나 사상, 재산이나 출세 이야기에 매달리는 것도 이제 지쳤다. 철학자처럼 생각하고, 종교인처럼 행동하고, 시인처럼 말하는 사람과 한 번쯤 말벗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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