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 꽃 이불/ 김미옥

이불장을 정리하다가 또 손길이 멈췄다아른아른 속이 비칠 듯 낡은 차렵이불 절대로 버리지 말라던 막내의 부탁이 매번 손길을 붙들었다아이에게 그건 단순히 낡은 이불이 아니다날이 갈수록 그리운 소꿉동무처럼 알록달록한 유년의 추억이 오롯이 담겨 있는 소중한 보물이다.

다섯 폭으로 된 이불은 베이지색을 중심으로 분홍과 베이지색이 양쪽에 두 폭씩 이어져 있다베이지색 바탕에는 연갈색 좁쌀만 한 꽃무늬가 잔잔히 흐르고위쪽엔 분홍색 깃가장자리로는 빙 둘러 같은 색 프릴이 달렸다또한 이불 전체를 바탕으로 큰 꽃 한 송이가 아플리케로 활짝 피어 있는데분홍 꽃과 연초록 잎의 단순하고도 산뜻한 대조는 딸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던 모양이다뿐만 아니다아가의 살결처럼 부드러운 감촉은 지금 만져 봐도 간지러울 정도로 기분 좋다꽃 이불은 늦가을부터 이른 봄까지 아랫목 지킴이였다보일러 방에 아랫목이 따로 있을까만 이불 깔린 자리가 곧 아랫목이었다자개장 앞에 펴놓은 꽃 이불 덕분에 안방은 언제나 화사한 봄날 꽃밭이었다.

계단을 콩콩 울리며 유치원에서 돌아온 아이가 맨 먼저 뛰어들던 곳빨개진 볼과 언 손을 녹이던 곳도 그 이불 속이다학교에서 돌아온 언니들과 얘기꽃을 피우며 간식을 먹을 때도눈빛 반짝이며 엄마의 옛날 얘기를 들을 때도 이불에 발을 묻고 둘러앉았다엎드려 책을 읽을 때나 텔레비전을 볼 때도 아이의 하반신은 꽃밭 속에 들어가 있었다소꿉놀이할 때도 꽃밭을 사이에 두고 이쪽과 저쪽 끝에 서로 다른 살림을 차리곤 했다.

뒹굴기 좋아하는 아이들이 아무리 짓뭉개도 지지도 꺾이지도 않는 분홍 꽃밭무릎 다칠 염려도 없이 맘껏 뒹굴며 꿈을 꾸는 꽃밭이었다.

어릴 적 유난히 이불 단속이 심하셨던 어머니 때문에 내겐 늘 아쉬움이 남아 있던 터였다어머니는 솜 이불은 솜이 숨 죽으면 못 쓴다고 밟지도 못하게 하셨다눈밭에 몸 도장 찍듯 이불 위에 두 팔 벌리고 훌렁 누우면 그 시원하면서도 푸근한 느낌이 얼마나 좋던지이불 개는 사이로 더러 뛰어들었다가 지청구를 듣기도 했다가끔 오빠 언니들이 어머니 몰래 태워주던 이불 비행기의 맛이라니천장이 흔들리며 약간 어지러운 듯그 재미나고 미묘한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까내가 좋아하던 그네 타는 맛과도 또 달랐다나중에 실제로 비행기를 탔을 때도 그 느낌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난 아이들에게 그냥 모른 척해 주기로 했다목화솜도 아니거니와 세탁도 전혀 문제 될 게 없었으니까삶아 빨아서 풀 먹이고 다듬이질해 다시 꿰매던 이불이 아니기에 쉽게 눈감아 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좁은 집이지만 오글오글 머리 맞대고 아무 걱정도 없던 그때를 아이는 그 이불에서 추억하는 것이리라그래서 보는 것만으로도 푸근하고 행복해지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의 추억만이 아니다아이 셋 키우느라 바쁘게 돌아치긴 했어도 아직은 탱탱한 볼에 발그레 수줍음도 얼마쯤 남아 있던 내 싱싱한 젊은 날도 들어있지 않은가아이들 머리 곱게 단장해 주고반질반질 걸레질도 힘든 줄 모르고부지런히 음식 만들며 식구들 기다리던눈부신 햇살처럼 설레던 시절을 고스란히 함께했던 이불이다아롱아롱 무지갯빛 꿈을 꾸던 그 시절허락만 된다면 인생에서 꼭 한번 다시 돌아가 보고 싶은 시절이다.

퇴역한 경주마처럼 몇 년째 바닥에 한번 내려와 보지도 못하고 긴 잠에 빠져 있는 이불은 더 이상 이불이 아니다더구나 요즘엔 선물 받은 이불들이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창고에 박혔는데 하물며 낡을 대로 낡은 이불임에랴하지만 손에 익은 물건이 정이 가고 추억을 공유한 사람이 각별하듯볼 발간 아이들이 세상모르고 꿈을 꾸던 이불 아닌가비록 고운 빛은 바래고 낡아 몸을 덮어주는 역할에서는 밀려났지만 마음을 데워주는 소도구로 특별하다는 생각이 든다이제 아이의 뜻이 아니더라도 선뜻 내치지는 못할 것 같다.

오랫동안 잊고 있다가 어느 날 문득 찾은 어린 날의 사진처럼 가끔씩 환한 꽃불 밝혀주는 분홍 꽃 이불을 다시 제자리에 반듯이 넣어두고 돌아섰다딸아이의 부탁 때문만은 아니었다이번에는 내가 그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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