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룰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꿈 / 박범신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윤동주의 <서시> 중 이 부분을 젊을 때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모래시계의 모래처럼 세월이 빠져 달아나는 것을 온몸으로 실감하는 요즈음, 자꾸 이 부분이 입속에서 웅얼거려진다. 이는 곧 살아 있는 존재에 대한 연민 아니겠는가.

 

그런가 하면 ‘한탄할 그 무엇이 두려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라는 박인환의 시구도 있다. 본성으로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면서’ 오늘도 나는 남은 생애의 어느 굽잇길에서 행여 한탄하게 될까 봐, 후회하고 상처받게 될까 봐 수시로 ‘당신’에게 등을 돌리고 떠난다. 돌아보면 그렇게 젊은 날을 떠나왔고, 그렇게 뜨거운 꿈들을 떠나왔고, 그렇게 순정과 사랑을 떠나왔다.

 

어떤 이가 묻는다. “당신은 왜 평생 소설을 써왔습니까?” “그야 혼자될까 봐 두렵기 때문이지요.” 나의 대답은 수많은 대답 중 하나에 불과하다. 하지만 정직한 대답이다. 쓰는 일은 내게 ‘잎새에 이는 바람’이면서 동시에 ‘한탄할 그 무엇이 두려워서 떠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쓰면 쓸수록 채워지는 게 아니라 갈망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떠나고 떠날수록 갈망이 깊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사람처럼 영혼의 스펙트럼이 넓은 존재는 없다. 이를테면 사람은 며칠만 굶주려도 남의 것을 훔치거나 쓰레기통을 뒤질 수 있다. 낮은 층위에서 보면 사람은 짐승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러면서 사람은 언어로써 뜻을 통하고, 제도로써 공평하게 나누는 길을 찾고, 사랑과 연민으로써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너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노래한 김춘수 시인이 노래한 그 ‘꽃’이 되는 게 사람이다. 여기에서 이름은 말할 것도 없이 존재의 본원적 의미일 것이다.

 

더 나아가 사람은 스스로 깨달아서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고 보면 사람의 영혼은 짐승이 사는 시궁창으로부터 신이 사는 하늘에까지 걸쳐져 있을진대, 어떤 층위에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 자신에게 달린 문제다. 겉으로 보아선 그게 그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렇지 않다. 깊이 들여다보면 지금 이 순간도 누구는 시궁창 가까이 살고, 누구는 하늘 가까이 살고, 또 누구는 지상과 하늘로 추락과 상승을 밥 먹듯 하면서 산다. 그것이 모여 사람 사는 세상이 된다.

 

내가 요즘 꿈꾸는 것은 대부분 이룰 수 없는 것들뿐이다.

예컨대 ‘영원’이나 ‘불멸’같은 꿈, 혹은 완전한 사랑, 완전한 세상에 대한 꿈, 더 이상 쓰지 않아도 될 ‘마지막 한 편의 소설’에 대한 꿈. 이성적으로 보면 백 번 생각해도 불가능한 꿈인데, 왜 나는 시시때때로 그 초월적 꿈들 때문에 가만히 앉아 있는 어느 순간조차 화염병이 되어 타오르고 스스로 벼랑 끝에서 투신하고 싶은 욕망으로 진저리치는지 모를 일이다.

 

생각하면 사람이기 때문에 그럴 터이다.

정보화가 세계를 지배하고 효용성이 극대화되어 얻는 일차적인 효과는 사람이기 때문에 꾸게 되는 초월적 꿈들의 해체 또는 중절이다. 남는 건 꿈의 찌꺼기, 혹은 꿈의 잔해로서 실용적인 목표뿐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꿈꾸지 않게 된다. 더 이상 ‘사람’이 아닌 상태에까지 도달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필요한 건 그리움이고 그리움이 깊어지는 사람들의 내면 풍경을 보는 일이다. 혹은 ‘한탄할 그 무엇이 두려워서’ 떠나온 것들 때문에, 혹은 이룰 수 없는 허다한 꿈 때문에 깊은 밤 홀로 앉아 그리운 많은 것들이 내 몸 안에 물처럼 차오르는 것을 때로 들여다보는 것은 좋은 경험이다. 목표는 꿈이 아니다. 목표 너머를 보는 마음이 꿈의 시작이고 그로써 그리움이 깊어지면 우리의 삶은 더욱 향기롭게 깊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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