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음의 행복

 

최원현

nulsaem@hanmail.net

 

  여섯 달 된 손녀가 몸 뒤집기를 하고 있다.

엎어졌다 뒤집었다를 몇 번 하고나면 힘이 빠질 만도 한데 아기는 그게 제 사명이라도 된다는 양 하고 또 한다. 재미도 있나보다. 지켜보고 있는 나와 눈이 마주치면 녀석은 까르르 웃어댄다. 그러고는 보란 듯 다리를 허공에서 두어 번 흔들흔들 해 보이고는 스르르 몸을 뒤집어 낮은 포복 자세가 된다. 그리고는 다시 나와 눈을 맞춘다.

 

 ‘할아버지, 재밌어요. 할아버지도 한 번 해 보세요’ 녀석은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녀석이 너무 귀여워 작은 주먹을 내 입안에 넣고 잘근잘근 이빨로 깨물어 주었더니 아픈지 손을 빼낸다. 손가락으로 그의 볼을 꾹꾹 눌러보며 아이와 눈 맞추기 놀이를 계속 한다.

 

 아기는 여섯 달 후면 첫 돌이다. 그때쯤이면 혼자서 일어서거나 한 발짝쯤 내딛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제 엄마를 부르는 외에 할아버지를 ‘하-지’ 정도로는 부를지 모른다. 그렇게 아이는 자라고 말을 배우고 걷고 뛰고, 여자애이니 머리도 길게 자랄 게다. 몇 년 지나면 젖가슴이 도드라지고 어깨도 도톰해 지고 긴 바지와 짧은 치마를 골라 입으며 기분 따라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기도 하리라.

 

  분홍빛 입술 사이로 목련꽃잎 같은 하얀 이가 돋아나고 그 사이로 첫마디 말을 뱉어내던 제 어미처럼 이 아이도 그러 하리라. 여자가 되고,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여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되리라.

 

 살아있는 것은 자란다. 변한다. 살아있다는 것은 흥한 만큼 쇠하고 종내는 소멸된다는 말이다. 사람만 생로병사가 아니다. 살아있는 것들은 죽음을 맞고 스러지며 정지하는 게 자연의 순리다. 그래서 살아있는 것이 아름답고 소중하다. 축복이고 행복이다. 아기가 자라는 만큼 나는 늙고 쇠할 것이며 그가 자리를 차지해 가는 만큼 나는 밀려나리라. 그런데도 그게 슬프지 않고 오히려 기쁘고 자랑스럽다.

 

  생로병사는 개별적인 자연현상이며 한 번의 순환을 통해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스러져 가는 슬픔이다. 그러나 그 슬픔마저도 불행이 아니라 아쉬움이다. 헤어짐에서 오는 안타까움이다. 그렇게 헤어져도 우린 다시 어디선가 만나리란 기대를 만들며 산다. 사람은 사람대로, 사물은 사물대로, 보이던 것은 흙이 되고, 보이지 않던 것은 영원의 처소에 모일 것으로 말이다.

 

  만일에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늘 영원하다면 얼마나 재미없고 멋없는 세상일까. 함께 하던 이의 떠난 자리가 유난히 커 보이는 것도 사랑하던 마음의 자리 그 흔적 때문이 아니랴.

 

 ‘옥은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캐야만 얻을 수 있고, 거울은 저절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비춰야만 보인다‘고 했다. 나고 자라고, 지고 사라지는 자연의 법칙 속에서 살아있음의 소중함은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것. 그래서 살아있음이 행복이리라.

 

 지금 내 사랑스런 손녀는 저와 눈을 맞춰주라고  내 눈을 찾고 있다. 녀석도 이게 행복임을 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