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혜자의음악에세이/ 영롱한 보석

정경화가 연주하는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듣는다.
서두엔 오케스트라에 화답하는 바이올린이 근심과 염원을 섞은 듯한 톤으로 짧게 되풀이되고 이어서 팽팽히 조율한 현(絃)이 바람을 몰고 나온다. 그 바람은 순간 긴장을 몰고 와서 구름과 비에 움츠려 있던 꽃봉오리들에게 다가간다. 차례 차례로 꽃을 피워내는 바람이 다시 미풍이 되어 화려한 꽃밭에서 노닐다가 연못가에 오스스 떨고 있는 풀잎의 미세한 흔들림을 느끼게 한다. 갑자기 파도가 철썩철썩 치는 바닷가에서 떠밀릴 듯하다.

정경화의 연주에는 바람과 색깔이 있음을 새삼 느낀다. 그 바람은 꽃잎의 생기를 더해주고 바다 빛깔도 짙푸르게 하는 생명력과 기운이 있다. 바람의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주변의 흔들림으로 감지하게 된다. 음악회나 영상으로 그의 불꽃튀는 열정과 절묘함에 감탄하다가 생각해봤다. 우리가 사물에서 바람을 느끼듯이 귀가 안 들리는 이도 그의 연주 모습에서 자기대로의 음악을 느낄 수 있으리라. 그의 연주엔 확실히 바람과 칼라가 있기 때문이다.

정경화는 잘 알려진 대로 1967년 권위 있는 리벤트리트 콩쿠르에서 핀커스 주커만과 공동 우승을 했다. 이후 마력적인 연주로 많은 사랑 속에 명성을 쌓아왔다. 70년에 나온 데뷔 음반,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청초하고 번뜩이는 기교로 극찬을 받았다. 뒤이어 71년에 내놓은 두 번째 음반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은 활력 있고 품위 있는 연주로 최고의 명반으로 꼽힌다. 71년 당시는 LP판이었는데 90년도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함께 CD로 출반되어 일본의 음반계에서 베스트셀러를 석권했다.

제2악장에서는 오색 꿈을 꾸는 듯한 달콤한 멜로디에 매혹된다. 그리움과 무한한 동경으로 변신을 꿈꾸게도 한다. 한 소절 한 소절마다 기도와 염원으로 빚어내는 것 같다.

능력과 노력의 은총을 받은 20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성장한 정경화는 자주 귀국 연주회를 가졌다. 지난 1990년도에도 연주회로 일시 귀국, 음악잡지의 인터뷰에서 "이 세상에 어느 하나도 하나님을 거치지 않고 만들어진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재능에 감사하며 그 재능을 알고 이 길로 들어서게 해준 어머니, 그리고 기초와 다양한 테크닉과 단계적으로 실력을 닦게 지도해 준 스승들의 은혜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스트레스와 음악활동에서 오는 회의를 신앙으로 극복한다는 그는 "어려서부터 교회는 다녔지만 음악적 야망 때문에 신앙의 깊은 기쁨을 느끼지는 못했어요. 그러나 지금은 믿음의 생활로 매사에 만족하고 있어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되면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되고 매사에 기쁨을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라고 해서 음악의 연륜과 함께 신앙의 깊이도 느낄 수 있어 반가웠다.

내가 매혹되어 자주 듣는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정경화가 풋풋한 시절에 연주하여 희망이 느껴진다. 그리고 음악과는 무관한 이유지만 재능과 부귀로 평탄한 생애를 보낸 작곡가의 작품이기에 더욱 부담 없이 듣는다. 역시 유복한 멘델스존의 영향을 받은 낭만적인 작품으로 달콤한 감상과 아름다운 여운이 한없이 매료시키기 때문이리라.

나는 58년에, 지금은 없어진 명동의 시공관에서 '정 패밀리'의 연주를 본 것을 지금껏 자랑으로 삼는다. 지금은 그들이 신동이었음을 익히 알고들 있지만 당시는 두 언니들의 플루트와 첼로 연주, 어린 경화의 바이올린 연주를 귀엽게 보았었다. 몇 년 후 경화와 명훈이 세계적인 콩쿨에 입상하여 화제가 되었을 때 어릴 때의 모습들이 떠올랐었다.

삼남매를 국제적인 음악가로 키운 어머니 이원숙 씨의 자녀교육 수기는 몇 년 전 베스트셀러가 됐었다.

"아이의 얘기를 귀담아 듣고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면서 아이의 소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 그 방면의 길로 인도해 주는 것"이 부모의 책임 가운데 첫째라고 했던 구절이 떠오른다.

경화 씨가 늦은 나이에 결혼하여 아들을 기르는 기쁨에 도취된 엄마로서의 모성을 92년에 TV 인터뷰로 보여준 일이 있었다. 아이들을 "하나님이 주신 최상의 선물"이라면서 행복에 찬 모습이었다.

올해 세계무대 데뷔 35주년을 맞은 정경화씨는 지난 4월 18일 수원 연주를 시작으로, 서울과 대구 등 8개 도시의 순회공연에서 지고의 도를 깨우친 대가로서의 여유와 진지함으로 극찬을 받았다.

이번 인터뷰에서도 세계적인 대가이면서 어머니의 사랑을 강조한다. 그리고 큰 아이가 피아노를 전공하겠다고 해서 기쁘다면서 그 아들과 집에서 협연할 때 가장 호흡이 잘 맞는다고 자랑도 했다.

자신이 12세에 미국으로 가서 유럽 음악도시를 다니며 무서운 훈련을 받을 때 어머니로부터 힘을 받아 일어섰다면서 "모든 것의 힘은 넉넉하고 따스한 사랑에서 나옵니다. 때로는 야단치시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엔 딸 편이 되어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시는 어머니는 지금도 저의 든든한 터전이지요."

힘이 나는 것, 그 근원이 바로 끝없는 사랑,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했다. 자신의 아이 키우기에도 가장 중히 여기는 것이 사랑으로 어떤 교육방법 보다도 진하고 뜨거운 사랑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있다고 했다. 새삼 하나님이 가정마다 신을 만들어줄 수 없어서 대신 어머니를 만들어주었다는 말이 생각난다.

정경화의 어머니는 "보석은 어디 갖다 놓아도 보석으로서 영롱한 빛이 변치 않는다. 사람이 실력을 키운다는 것은 몸 속에 보석을 품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궁할 때 보석이 돈이 되듯 우리가 곤경에 처할 때 실력은 힘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자식들을 성공적으로 키워 나라를 빛낸 어머니로 칭송을 받는다.

어느 어머니인들 자식을 영롱한 보석으로 키우고 싶지 않으랴. 젊은 날의 고도의 긴장감 대신 자애로운 어머니로서 "몰아치던 열정이 내 안에서 서서히 익은 것 같다"는 말처럼 여유와 따뜻함이 배어 있다는 정경화의 새로운 음반을 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