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곧은 거목

 

                                                                                                                임병식

 

 

 나무가 한 54년쯤 자랐다고 해서 무작정 거목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나무가 심어진 지 470년이 넘도록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사람들의 기억에 잊혀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있다면  능히 거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거목은 꼭 실재해야먄  하고, 그래야만 품격과  값어치가 나가는 건 아니다. 그리고  미치는 영향도  큰 게  아니다. 그러한 데는 나무뿐 아니라 사람도 다르지 않다. 그 거목이 품위가 격조가 있으며  공훈이 우러러 볼 정도로 크다면  후세에까지  기려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 거목으로  나는 5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구국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장군(1545-1598)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장군은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한산도대첩과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모두  스물 세차례 참전하여  연전연승의  놀라운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면서도 복무중에 세차례의 파직과 두차례의 백의종군이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런 장군을 내가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투철한 국가관 못지 않게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드물게 보는 올곧은 성품을 지녔기 때문이다. 장군의 벼슬길은 그야말로 고난을 헤쳐온  순탄치가 않은 길이었다. 적당히 아부하면서  부정과 비리를 눈감아 주었다면 넘길 수도 있는 일들이었지만 그렇지를 못했다.  워낙에 성품이 올곧고 강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런 고난은 스스로  자초한 측면도  없지 않다.

 

장군의 시련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32세(1576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동부비보의 근무를 마치고  훈련원 봉사직책을 맡아 한양에 부임한 때부터 시작되었다. 하루는 훈련원 병조정랑 서익(徐益)이라는 자가  인사서열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사람을  승진시키려고 했다. 장군은 단호히 거절했다.

 

아래 있는자를 건너뛰어 천거한다면 당연히 승진할 사람이 누락되어 공정하지 못할뿐더러 그러자면 법규를 고쳐야하는데 그것은 옳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일은 두고두고 장군을 불편하게 여기고  누명을 쓰는 빌미가 되었다.

 

 장군이 발포만호(1580년)로 부임한  때였다. 5대 전라좌수사로 있던  성박(成鎛)이 사람을 보내 거문고를 만들려고 관아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가려했다. 장군은 당연히 심부름꾼을 호되게 꾸짓었다.

“이 오동나무는 나라의 물건이다. 사사로운 용도로는 쓸수가 없다. 본시 심은 뜻이 있을테인데 어찌 오래된 고목을 아루아침에 베어 국용에 쓰지않고 사사로운 물건을 만든단 말이냐?”

이 사실은 즉시 보고가 되었다.

 

성박은  복수를 노렸다. 충무공을 버릇없고 무능하다고 소문을 퍼트리는 한편,  인사고가도 나쁘게 반영했다. 나쁜소문은 진실처럼  퍼져나갔다. 하루는 어렵사리 복귀한 장군을  전라감사 손식(孫軾)이  능성(화순)으로 불렀다. 혼을 내줄 참으로  장군에게 진(陣 )을 치는 도형을 그려보라 명했다.  정밀하게 그려내자 그때서야 악소문을 믿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헤칠 마음을 풀었다.

 

장군에게 가해진  음해는 집요하고 끈질겼다. 오동나무 사건으로 망신을 당한 성박에 이어   후임으로  부임한 이용도 다를것이 없었다. 그는 또다시  장군을 벌주려고 불시 점고에 나섰다.  관내 5관4포의 점검을  마치고  발포에 이르렀다.

 

그는  3명의 결석자를 문제삼았다. 하나 이것은  형평에 어긋난 것이었다. 이미 다른 곳에서 수십명의 결석자가 있는 것을 감추고 작은 허물을 따진 것이었다. 하지만 장군은 이미 그 명단을  입수한 터였다. 이를 좌수사의  수하가 눈치챘다.

 

“이용에게 귀띔을 했다.

“발포의 결석자가 3명이고, 4포의 결석자가 훨씬 많은 것을 만호가 아는데 만약 장계를 올린다면 뒷날 해로운 영향이 있을까 저어됩니다.”

이에 수사는 깜짝 놀라서 장계를 되찾아오라는 일까지 있었다.

 

하늘은 장군을 단련시키려고 했을까. 악연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처음 인사청탁을 했던  서익이 이번에는 군기차관이 되어 발포에 나타났다. 그는 앙갚음을 하려고 ‘군기를 전혀 보수하지 않았다’며 파직을 상고했다. 이는 장군이 생애 첫 파직을 당한 일이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1586년, 장군이 함경도 군산만호로 부임한 때였다. 함경병사  이일에게  장군이 여진족 침략을 맞기위해서  수차례  병력보충을 건의했다. 그러나  묵살했다. 장군은 다른 곳의 장수가 죽어나가고  병력 손실이 많은 중에도  경흥부사 이경록에게 도움을 청하여 적을 물리쳤다. 그리고 백성 60여명을 구출해 냈다.

 

그런데 적반하장으로  병력보충을 묵살한 이일은 자기의 과오를 감추려고 휼계를 꾸몄다. 이에 장군이  단호히 말했다.

"내가 힘껏 싸워 적을 물리치고 백성 60명을 구출하고 돌아왔는데 그 전쟁이 어찌 패전이라 할 것이며 또 군사를 더 배치해 달라고 몇번이나 청했으나 불허한 공문서 서목이 내 수중에 있으니 조정에서도 죄가 결코 나한테 있지 않음을 알것이요."

 

이렇듯 장군의  23년간의 군생활은 파란만장했다. 이는 장군이 전라좌수사와 삼도수군통제사로 있으면서 원균등에게  당한 모함을 제외한 행적이다.

 

바르게 살기가 얼마나 힘든일인가. 그러나 장군은 그 일이 공익이 아니고 정의롭지 못한 일에는 결코 눈감지 않았다. 그것이 비록 자신에게 위해로 다가온다고 해도 개의치 않았다. 그점이 더욱 훌률한 것이 아닐까.

 

장군은 매사에 냉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아들 면(冕)이 명량대첩 한달후에 죽자 코피를 한되나 쏟으며  비통해 했다. 그러면서도 최후의 출진을 앞두고는 “이 원수를 갚으면 죽어서도 여한이 없겠나이다(此讐若除 死則無憾)”하고  나라사랑의  마음을 남겼으니 어찌 거목이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