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는 나에게 항상 설렘과 함께 두려움을 주었다. 무대 위에 조명을 받고 있는 그 악기는 왕자처럼 도도하고 고귀해 보인다. 윤이 나는 검은 빛의 피아노는 주위의 분위기를 압도한다.

어린 시절 골목길에서 들려오던 피아노 소리는 나에게 한없는 갈망과 동경을 불러 일으켰다. 나는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우게 해달라고 졸랐다. 전쟁후의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어머니는 나의 청을 들어 주셨다.

   
 
  염정임 수필가  
 

서울에서 피난오신 선생님한테 가서 피아노를 배웠다. 집에 피아노가 없어서 마분지로 건반을 만들어 붙이고 손가락 연습을 하곤 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교내 콩쿨이 열렸다. 무대에 올라가니 강당을 가득 채운 학생들의 시선에 나는 얼어붙고 말았다.

피아노 앞에 앉으니까 마치 피아노 건반을 처음 본 것처럼 낯설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극히 초보적인 쉬운 곡이었지만 그 곡이 하나도 생각이 안 났다. 나는 지정곡의 절반도 못치고 도망치듯 내려오고 말았다. 나는 너무나 부끄러워 친구들을 쳐다 볼 수도 없었다.

그 후 나는 피아노로부터 점점 멀어져 갔다. 그러나 음악을 듣는 것은 지금까지 나에게는 큰 즐거움이 되고 있다. 특히 피아노 연주를 듣고 있으면 나의 실핏줄 하나 하나가 잠을 깨고 일어나는 듯하다.

올해는 특히 쇼팽과 슈만이 탄생한 지 200년이 되는 해라, 그들의 피아노곡들이 자주 연주 되고 있고 FM에서도 특집으로 다루고 있다. 이번에 처음으로 클라라 슈만이 작곡한 곡도 들을 수가 있었다. 거의 200년 전의 음악가가 작곡한 음악이 오늘의 우리에게도 이렇게 기쁨 이상의 기쁨을 주고, 우리의 미감을 충족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슈만과 쇼팽은 낭만주의 음악의 대가들이다. 슈만은 독일에서 태어나 스승인 빅교수의 딸인 클라라와 결혼하기 위해, 반대하는 스승과 법정 싸움까지 해야 했고, 나중에는 신경쇠약으로 라인 강에 투신해서 자살을 기도한다.

쇼팽은 폴란드에서 태어나 프랑스에 와서 살면서 향수병에 시달렸고 연상인 죠르주 상드와 사랑했지만 폐결핵으로 39세에 세상을 떠난다. 그는 피아노 작곡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화려하면서도 율동적인 피아노 음악을 많이 작곡했다. 반면에 문학에 심취한 슈만은 내향적이며 그의 피아노곡은 보다 음영이 짙고 여운이 느껴진다.

 둘 다 선병질적이고 섬세한 영혼을 가졌기에 그들의 삶이 고통스러웠지만 음악은 너무나 영롱하여 지금의 우리들에게까지 심금을 울리고 있다.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생전에도 교분이 많았던 것 같다. 슈만은 자기가 발간하는 음악 잡지에 쇼팽을 소개하기도 했고, 쇼팽은 발라드 1번을 슈만 앞에서 쳤다고 한다.

흔히 예술가들의 삶이 고통스러울수록 그들의 작품은 우리를 더욱 더 감동 시키니, 예술가들은 고통의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인 것 같다.

왜 좋은 음악은 우리를 그 속에 점점 빠져들게 할까? 그래서 옛 동양에서는 음악을 하나의 위험한 예술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멜로디가 우리의 귀에 닿아서 뇌로 전달되어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이 될까?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느끼는 행복감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 때에 느끼는 감정과 비슷한 것 같다.

나의 영혼이 고양되고 나의 존재가 비현실적인 먼 세계까지 확대 되는 느낌……. 흔히들 언어가 끝나는 곳에서 음악은 시작 된다고 한다. 음률의 세계는 이데아의 세계이며 상상력과 몽상의 영역이다.

연주자가 피아노를 대하는 마음은 어떠한 것일까? 승마를 하는 사람들은 말과 자신의 호흡을 맞추기 위해 말을 쓰다듬기도 하고 말과의 어떤 교감을 갖도록 노력할 것이다.

악기의 경우는 어떠할까? 말은 동물인지라 생명끼리의 교감이 가능하겠지만 악기는 사물인 것이다. 바이올린이나, 플루트 같은 악기들은 연주자가 매일 손에 들고 연습해서 연주 할 때에도 그대로 손에 익을 것이다.

그러나 피아노는 다르다. 집에서 몇십 년 동안 연습하던 악기가 아닌 그 무대에 놓인 피아노를 연주해야 하는 것이다. 호로빗츠나 미켈란젤리 같은 세계적인 연주가는 연주회 때마다 자신의 피아노를 공수해 왔다고 한다.

피아니스트가 무대에서 피아노의 첫 음을 칠 때는 어떤 마음일까?

흔히 작가들이 원고지의 하얀 면을 대할 때나 등산가들이 높은 산을 향하여 한 발을 내디딜 때와 같을 것이다. 온 우주에 홀로 서 있는 듯한 절대적인 고독 속에서 그는 한 발 한 발 순례의 길을 떠난다.

피아니스트는 때로는 피아노를 압도하고, 때로는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부드럽게, 같이 장난하듯, 숨바꼭질하듯 양손을 번갈아 가며 건반을 누빈다. 52개의 흰 건반과 그보다 조금 높게 솟아 있는 36개의 검은 건반은 피아니스트가 건너야 될 강이며, 넘어야 될 산인지도 모른다.

연주란 작곡자가 악보에 감추어 놓은 비밀스러운 기호와 상징들을 살려내는 일이기도 하다. 흰 건반 위를 빠른 템포로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은 마치 밀려오는 파도의 흰 포말 위에서 노니는 물새들의 발놀림 같다.

뉴질랜드의 여성 감독 잰 캠피온의 영화 <피아노>에서 피아노는 여주인공의 영혼의 동반자이다. 세상을 향해 마음 문을 닫고 사는 말을 못하는 장애를 가진 여주인공은 어린 딸을 데리고, 얼굴도 못 본 신랑과 결혼하기 위해서 영국에서 뉴질랜드에 온다.

그녀에게는 피아노만이 존재 이유가 되며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이 된다. 결국 남편과의 결혼 생활이 파국에 이르고 그녀는 배를 타고 그곳을 떠나게 된다. 그녀는 피아노를 묶은 끈에 자신의 발을 묶어 피아노와 함께 자신도 바다에 빠진다.

나는 지금도 어느 집에 피아노가 놓여 있는 것을 보면 건반을 한번 열어 보고 싶다. 흰색의 가지런한 건반을 보며 거기에 숨겨진 신비한 음향들을 상상하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