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 오브 아프리카 / 정성화

  

  

이삿짐을 싸다가 옛 일기장을 발견했다. 분명히 내 글씨인데도 마치 남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낯설었다. 그 중 눈에 들어오는 페이지가 있었다. 

 

“오늘은 그와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보고 왔다. 이렇게 좋은 영화를 보게 되다니…. 아무리 힘들어도 삶은 무조건 이익이다. 돌아오면서 오랜만에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예술은 치료의 형태를 띤다고 했다. 맞는 말인 것 같다. 아름다운 음악을 듣거나 멋진 풍경화를 보고 있으면 잔뜩 굳어있던 마음도 카스테라처럼 금세 부드러워지니 말이다. 영화도 그렇다. 영화 속 주인공의 고통을 지켜보고 있으면 나의 걱정거리는 어느새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숱한 시련 끝에 마침내 주인공이 행복해 지는 걸 볼 때는 왠지 내 삶의 가지에도 ‘희망’이란 수액이 올라오고 있는 느낌이 든다.

그 영화가 다시 보고 싶었다. ‘삶은 무조건 이익’이라고 쓴 구절 때문이었다.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런 느낌이 들지 궁금했다. 다행히 비디오 테이프를 구할 수 있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는 광활한 초원과 붉은 석양이 장엄하게 펼쳐지는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자유로운 한 남자와 여자의 운명적인 사랑과 모험을 그린 영화다. 영화는 1913년 아프리카 케냐의 대초원을 달리는 기차로부터 시작된다. 고향 덴마크를 떠나 케냐로 온 카렌은 안정된 가정을 꾸려가고 싶었으나 남편의 외도로 인해 그 꿈이 무산된다. 그 무렵 우연히 자신의 커피 농장에 들른 사냥꾼 테니스를 만나게 되고, 자신과 매우 비슷한 영혼을 가졌음을 알게 된다. 아프리카와 모차르트를 사랑하고 문학을 좋아하는 테니스, 그는 분명 매력적인 남자였다. 그러나 그는 결혼이란 제도 속에 묶이는 걸 원치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큰 화재까지 일어나 커피 농장마저 잃게 된 카렌은 모든 것을 접고 아프리카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떠나기로 한 날, 그녀를 배웅하겠다던 테니스는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그가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질 뿐이었다.

 

몸과 마음이 지칠 때면 나는 이 영화에 나온 장면들을 자꾸 떠올렸다. 몸이 지친 날은 카렌과 테니스가 노란 경비행기를 타고 아프리카의 푸른 하늘을 나는 장면을 떠올렸고, 마음이 울적할 때는 광활한 아프리카 초원의 풍광과 그 초원 위에 축음기를 놓고 턴테이블을 돌리던 테니스를 생각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의 머리를 정성껏 감겨주던 그의 모습과 그때 흘러나오던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2번의 선율을 떠올리곤 했다.

카렌, 그녀는 상처보다 외로움을 더 두려워했다. 카렌의 남편은 결혼식 다음날 사냥을 떠나 며칠 째 돌아오지 않았다. 숲속에서 비에 흠뻑 젖은 채 남편을 기다리는 그녀는 젖은 날개를 펴보려고 파닥이는 한 마리 산새처럼 보였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며칠만에 돌아온 남편에게 카렌은 짧게 말한다. “당신을 기다렸어요.”라고. 그 말 속에 들어있는 간절함이 어떤 것인지 알기에 저절로 눈물이 났다.

전쟁터에 있는 남편에게 전할 구호물자를 싣고 가던 도중, 카렌은 야영지에서 한밤중에 사자의 습격을 받는다. 그러나 카렌은 당황하지 않고 용감하고 침착하게 채찍을 휘둘러 사자를 쫓아버린다. 그녀의 삶의 방식은 고통으로부터 도망가는 게 아니라 고통과 맞부딪치면서 견디어내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스카렛 오하라와 닮은 점이 많은 여자다.

 

그들의 사랑은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나 테니스는 그녀는 잠재되어 있던 문학성을 감지하고 이끌어내 준 사람이었다. 그녀로 하여금 끊임없이 이야기를 짓게 하고, 그녀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었다. 카렌이 훗날 소설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곁에 테니스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사랑이란 상대를 속박하는 게 아니라 그들처럼 상대방으로 하여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도록 진심을 다해 도와주는 게 아닐까 싶다.

아프리카에서 지낸 십칠 년을 회상하는 카렌의 독백은 매우 수필적이다. “아프리카는 나의 노래를 알까? 내가 강렬하게 느꼈던 색깔들이 초원의 대기에서 피어오를까? 보름달이 떠올라 내가 걸었던 자갈길 위에 나 같은 그림자를 드리워줄까?” 그녀는 뒤늦게 깨닫는다. 아프리카는 소유하거나 길들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과 있는 그대로가 아름다웠다는 것을.

 

영화를 다시 보면서 확연히 느낀 게 있다. 사는 동안 미련이 남지 않을 만큼 충분히 사랑하고, 서로의 어깨 너머 세상까지 끌어안을 수 있어야 진정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카렌과 테니스의 사랑은 짧았지만 충만한 사랑이었다. 이십 년이 흘렀지만 이 영화가 주는 울림은 여전히 강렬했다. 내 곁에 문학이 있고, 이렇게 멋진 영화가 있는 한, 삶은 무조건 이익이라는 것을 나는 다시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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